시간 속으로 – 역사와 추억의 발자취

제 2화: 팔머 중위의 선행에 대한 감사의 편지, 11년 후 팔머 선교부 회장에게 전달되다

조지 큐 캐넌 삽화

기사 작성일: 2020년 11월

  • 글: 김대연 (한국 교회역사위원회 전문가)
  • 일러스트레이터: 이인규 (한국 교회역사위원회)

평소와 달리 뒤늦게 전해진 편지가 사람들 마음에 무엇인가를 남길 때가 있다.

전설적인 음악 밴드 비틀스의 핵심 멤버로 1980년에 세상을 떠난 존 레넌에게도 그런 편지가 있다. 레넌은 무명의 한 젊은 뮤지션이 한 음악 잡지와 가진 인터뷰를 읽고 그에게 조언의 편지를 잡지사에 보냈는데, 정작 그 편지는 다른 곳에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34년 뒤, 한 수집가의 손을 통해 편지 내용이 알려진 적이 있었다. 이 편지가 모티브가 되어 “대니 콜린스”(Danny Collins)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2015년에 공개되었다. 미국의 명 배우, 알 파치노가 주연으로 출연하여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김호직 수기 편지 (성도의벗, 1967 9월호)
김호직 수기 편지 (성도의벗, 1967 9월호)

우리 한국 교회 역사에도 이런 편지가 있다. 위쪽 사진은 한국에서 우리 교회가 시작될 때, 초대 한국지방부장으로 당시 교회의 큰 우산 역할을 하셨던 김호직 박사가 6.25 전쟁 당시에 군목으로 복무했던 스펜서 제이 팔머 중위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이다.

당시 성도의 벗(리아호나의 전신)에 편지 번역본과 함께 게재된 사연을 그대로 옮겨본다.

편지

“이 글에서 김 자매라 함은 김도필 자매님을 가리킨 것이다. (스펜서 제이) 팔머 회장께서 군목으로 한국에 계실 때에 자재를 구해다가 미군 형제와 한국인 성도들의 힘을 합하여 최재신 형제의 집을 지어 주었고, 미군 부대에서 갖던 집회를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1956년 5월 서울지부를 창설한 파우엘 (장로와) 뎃튼 장로는 선교부에서 증파된 선교사를 맞아 부산 지부를 창설하기 위하여 먼저 김호직 장로를 부산에 가시게 하여 선교사 숙소를 마련하게 하였다. 김 장로님은 최 형제 댁에서 갖은 상향회에 참석하시어 파머 부장의 노고로 그 집이 지어진 일을 알고 감사와 안부를 몇 자 적어, 귀국한 파머 형제의 주소를 아는 김도필 자매님께 이 편지를 부쳐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상경하셨다. 당시 피난 생활이라 정리되지 않은 살림이어서 김도필 자매는 어느 책 속에 꽂아 두고 그만 11년의 세월에 흐르고서야 수 일 전에 선교부장님에게 전달되었다. 편지를 쓰신 분(김호직 박사)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받는 분(팔머 한국 선교부 회장)은 한국에 선교사가 오기를 갈망하여 [제일회장단]에 편지까지 내어 해롤드 비 리, [조셉] 필딩 스미스 사도의 내한에 이어 선교사의 파견을 가능케 하여 이젠 선교부장이 되셨다. 11년 만에 이 편지를 받아든 선교부 회장의 감회는 어떠하였을까. 김 박사님의 친필을 대해 보니 감개 무량하다.” (성도의 벗, 1967년 9/10월호, 62~63쪽)

부산의 초기회원들 왼쪽부터 박재암, 김박사, 국영길, 김도필, 최재신
부산의 초기회원들 왼쪽부터 박재암, 김박사, 국영길, 김도필, 최재신

지금, 이 편지와 관련된 세 분 모두 휘장 저편에 계시는바, 아마도 이 편지와 관련해 거기서 웃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편지의 날짜는 1956년 7월 5일. 선교사가 입국한 지 두 달이 조금 더 지난 이 무렵, 김호직 박사는 문교부 차관직을 사임했거나 적어도 사임 의사를 갖고 계셨는데, 미국에서 당신의 개종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고, 또 친구가 되어 귀국 후에도 서신 왕래가 있었던 우드 형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그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갓 도착한 8명의 선교사]에 대해 놀라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70명 회원이 있고 우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올바르게 우리의 형제와 자매로서 그들을 초대합니다. 저는 지난 7월 문교부 차관직을 그만두었는데 우리 교회에 더 많은 시간과 힘을 쏟기 위해서입니다.” (1956년 12월 2일, “내 양을 먹이라”, 79쪽)

또한, 팔머 선교부 회장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그가 선교사업과 군 복무를 마치고 인생 진로를 결정할 때, 한국에서 1954년에 해롤드 비 리 장로와 나눴던 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리 장로가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스펜서, 교회가 아시아에서 사업을 펼쳐나가려면 자네나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할 걸세. 자네가 한국 사람들과 계속 가까이 지내면 좋겠네. 자네가 이 땅에서 일하기에 딱 좋은 사람이 되어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해나가게나.” (“Saints at War”, Vol. 2, 130쪽)

팔머 회장에 대해 더 자세히 언급할 때가 있겠지만, 그는 해롤드 비 리 회장의 조언을 따르기로 선택했고, 당시 미국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동양학을 전공했는데, 그 바탕은 바로 신앙이었다.

현재 우리 한국 교회의 밑바탕에는 이 척박한 땅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스스로 거름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개척자들의 희생과 수고가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이 [포도원의] 주인에게 이르되, …… 이는 주인의 포도원 모든 땅 가운데 가장 척박한 곳이었음이니이다 …… 포도원의 주가 [종]에게 이르되, 나에게 권고하지 말라. 나도 이 곳이 척박한 땅인 줄 알았노라. 그러므로 …… 내가 이 오랜 세월을 그것에 거름을 주며 길렀다 하였노니,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었음을 네가 보느니라” (야곱서 5:21~22)


주)

1. 김호직

한국 국적 소지자로 최초의 교회 회원이며, 정부 파견 도미 유학생 시절이던 1951년 7월 29일에 사스케하나 강에서 침례를 받았으며, 1956년 한국 헌납 당시에 한국 지방부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1957년 4월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재단법인 설립 승인을 받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초대 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에 대한 세상적인 소개는 다음과 같다.

“평안북도 벽동 출생. 벽동농업학교·수원고등농림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제국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숙명여자전문학교에서 생물학과 영양학을 가르치는 한편, 우리의 전통적인 식생활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즉, 오랜 문화사적 배경을 가진 우리의 전통적인 음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그 영양가를 조사하는 한편, 우리의 역사·기후·풍토가 우리의 식생활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태학적으로 연구하여 1944년『조선식물개론』을 펴냄으로써, 우리 나라 음식물의 우수성을 조명하고 우리 나라 음식물에 대한 연구법을 제시하였다. 1949년 정부파견 유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학에서 영양학석사와 「콩단백의 영양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부산수산대학장, 연희대학교 교수, 문교부차관,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콩의 영양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여 콩을 주요 재료로 하는 보강식(補强食)을 발명(특허등록번호 448호)하였다.

이 밖에도 우유와 고기에 의한 영양개선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논저로는 「소맥분 보강에 대한 연구」·「콩단백에 관한 연구」등이 있다. 국민영양의 계몽·개선과 농사교육 보급에 이바지한 공으로 1953년에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학술원회원, 유네스코한국집행위원, 한국영양협회 회장, 도의생활연구회 회장, 창신육영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 스펜서 제이 팔머

1953년에 군목으로 중위로 한국에서 복무했으며, 1954년 해롤드 비 비 장로의 방한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65~1968년에는 한국 선교부 제2대 회장으로 봉사하였으며, 이 당시에 현재의 서울 성전 부지를 구입했다. 1988~1990년에는 서울 성전 회장으로 봉사하였으며, 초기 회원들의 신앙 경험을 담은 “한국의 초기 말일성도”라는 책을 아내 셜리 팔머와 함께 출판했다. 교회 역사와 관련해서는 “The Church encounters ASIA”라는 책을 1970년에 출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동양학 연구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브리검 영 대학교 프로보에서 종교학 교수로 일하며 아시아 및 국제 종교와 관련된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1993년에는 중국에서 방문 교수로 가르쳤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지역대표(현재의 지역칠십인과 유사한 역할)로도 봉사하며, 평생을 아시아와 관련되어 일했다. 더 자세한 약력은 위키디피아를 참고한다.

3. 김도필

1908년에 태어나 19세에 결혼하여 20대 후반에 남편과 사별하여 1남 2녀를 양육하였다. 1955년 1월 23일에 부산에서 침례를 받았으며, 이후 서울과 미국에서 생활했으며, 류머티즘을 앓으면서도 초기 상호부조회 지도자로서 선구적 역할을 하는 한편으로 선교사들을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던 것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기억하고 있다. 1983년 3월 30일, 세상을 떠났다.(한국의 초기 말일성도, 27~33쪽 참조)


궁금증 

김호직 박사는 서울과 부산을 왕래할 때, 어떤 교통편을 이용했을까? 기차였을까? 버스였을까?

서울과 부산은 지금도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전쟁이 끝나고 교통망이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1. 위 기사와 관련해 의견 또는 정보가 있으신 분
  2.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교회 생활과 관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 분
  3. 역사위원회 활동에 관심이 있으신 분

adrianme@naver.com

010-3764-6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