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이 유이치 형제 오카야마 스테이크 타카하시 그룹
현재 오카야마 스테이크의 회장으로 봉사 중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으니, 이 중요한 사업을 하지 못할 때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¹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은 1981년에 가족 역사 사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막 개종한 젊은 이마이 유이치 형제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마이 형제는 열심히 자신의 뿌리를 찾아 조상의 구원 사업에 주력했고, 선교 사업 전에 그는 4대까지의 조상의 계보를 도쿄 성전에 제출했다. 귀환 후에는 특별한 인도를 받아 50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의 족보를 구하는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받아 왔다”고 이마이 형제는 회상한다.
가족 역사에 열심이던 신앙 생활의 톱니 바퀴가 차질을 빚은 것은 그의 사업이 성공하여 도쿄로 진출하던 해였다. 그는 탄소 필름 기술을 응용한 인공 근육 제조 연구 개발에 애쓰고 있었고, 더 이상 가족 역사를 탐구할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사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의 사업에 투입된 연구비는 점점 더 많아졌으나 이렇다 할 연구 성과가 없었다. 충실한 십일조와 성전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2009년에는 경제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빠져 사업을 철수하고 고향인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일본 남서부의 도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생각을 안고, 이마이 형제와 아내인 이마이 마키코 자매가 지난 5년 동안 비워 두었던 집을 청소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마키코 자매의 앞에 두툼한 봉투가 떨어졌다. 봉투 속에는 조상의 성전 의식 카드들이 들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직 의식을 끝내지 않은 카드들이 여러 장 발견되었다.
이마이 형제는 “일에 몰두했던 그 5년 동안, 신성한 의무를 마음 한구석으로 몰아넣고 돌보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회상한다. 그날을 기점으로 이마이 형제는 다시 조상의 구원 사업에 힘쓰기 시작했다.
12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
2013년 12월 30일에, 이마이 형제는 교회 회원, 친구들, 가족과 함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화 주제가 가족 역사로 흘러가자 이마이 형제의 어머니 이마이 레이코 자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는 게 족보라면, 집에 몇 개 있는 것 같아.”
레이코 자매가 가져다 준 “구마다의 사람들”이라는 책은 레이코 자매의 큰아버지가 자신의 집에 있던 기록들을 모아 한 권으로 묶은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마이 형제로부터 1200년 정도 앞선 선조들의 기록까지 적혀있었다.
그 기록에는, 오카야마현 북부를 통치했던 가문의 시조, 미우라 사다무네가 레이코 자매의 조상이며, 미우라 사다무네가 카나가와현 미우라 반도에서 오카야마현 북쪽으로 이주해 가쓰야마 성을 축성한 것 등도 기재되어 있었다.
더 많은 조상을 알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던 이마이 형제는 인터넷과 관련 서적을 뒤지며 일본과 동북아의 고대사를 조사하고 조상에 관해 탐구했다.
미우라 사다무네의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조사하면서, 그는 자신이 삼국시대의 백제 왕국의 후손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마이 형제의 조상인 진손왕은 백제의 14대 왕인 근구수왕의 손자이며, 그는 논어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동해를 건너 일본에 이주했다가 일본으로 귀화했던 인물이다.
자신의 뿌리가 바다 건너 한반도의 왕족이었다는 것을 알고 이마이 형제는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분산된 이스라엘이 어떤 경로를 따라 일본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나의 뿌리가 대륙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뿌리를 찾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고, 전 세대에 걸쳐 조상을 연결하는 것에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조상이 인도한 어머니의 개종
이마이 형제는 조상의 이름을 성전에 제출하고 그들이 성스러운 의식을 받는 데 일조함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 기쁨과 축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이마이 형제의 어머니 레이코 자매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이마이 형제의 개종 이후로 모자 관계는 항상 어색했다.
레이코 자매는 “너의 종교와 나는 언제까지나 평행선이야.”라고 말하며 선교 사업에서 귀환한 손자들이 보내 온 몰몬경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했다. 이마이 형제는 어머니가 생전에 개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포기했었다.
2015년에, 그런 레이코 자매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이마이 형제의 딸 마리아 그리고 조카 도바시 하루나 자매가 비슷한 시기에 선교 사업에서 귀환하면서, 이 손주들의 손에 이끌려 레이코 자매가 몰몬경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이마이 형제는 이 기적이 선조들에게서 온 힘이라고 확신한다. “저는 그때 어머니 집안의 가족 역사를 상당히 진행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1000년 이상의 기간에 해당하는 조상들의 성전 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가계에서 교회 회원이 아닌 사람은 어머니뿐이었습니다.”
레이코 자매는 선교사와 토론하기 시작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선교사와 만나 토론이 5분 정도 지속되면 레이코 자매는 일어서서 어디론가 가 버리기도 했고, “오늘은 기분이 나쁘다.”라며 문 앞에서 선교사를 돌려보내는 일도 있었다.
고민하던 이마이 형제는 조상의 힘을 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어머니의 조상의 땅인 오카야마현 마니와시로 여행을 갔다. 그는 레이코 자매의 친가 쪽 가문의 시조인 미우라 사다무네의 묘지와 외가의 조상인 와타나베 토우베라는 무사의 생가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다음 날 토론을 위해 방문한 이마이 형제와 선교사들은 어머니 레이코 자매에게서 어떤 변화를 느꼈다. “이렇게 행복한 어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영과 빛이 함께했고 정말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사실 그 가족 여행 이후로 레이코 자매는 다양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레이코 자매는 꿈 이후로 토론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이마이 형제는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구름 위를 뛰듯 걷고 있는 한 여성이 꿈에 나왔다고 합니다. 노래하듯 그 여성은 ‘교회에 가자, 교회에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녀의 뒤를 쫓아가서 얼굴을 봤을 때, 놀랍게도 교회에 가자고 노래하던 그 여자는 어머니 자신이었습니다.”
2016년 8월에 레이코 자매는 아들 이마이 형제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후 이마이 형제와 레이코 자매는 함께 가족 역사를 입력하고 조상의 연고지를 함께 여행하며 돈독한 관계를 쌓고 있다. 이마이 형제는 조상 덕분에 어머니가 구원의 길로 인도된 것을 강하게 느꼈다.
선조들의 고향, 한국 서울 성전에서 인봉되다
2019년 6월에, 이마이 형제는 치바현에서 개최된 G20 연례 세계 종교 포럼²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북 아시아 지역 홍보 책임자인 오희근 형제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이마이 형제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들은 오 형제는 매우 기뻐하며 이렇게 제안한다. “8월에 한국에서 AYC 지역 연합 청년 대회³가 열릴 때, 서울 성전에 오셔서 조상의 대리 인봉 의식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마이 형제는 이렇게 말한다. “그 권유를 듣자마자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서기 380년 경에 일본으로 온 뒤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조상들이, 그들의 고향인 한국에서, 그들의 후손들에게 인봉될 것이라고.”
이마이 형제는 북 아시아 지역 회장인 최윤환 장로에게 연락하여 이 인봉 의식을 집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 장로는 이마이 형제의 딸인 마리아 자매의 선교부 회장이었고 마리아 자매의 성전 결혼 인봉자이기도 했다. 최 장로는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8월이 되어 이마이 형제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조상들의 인봉 전에 미리 집행했어야 할 대리 침례, 예비 의식, 엔다우먼트 등의 의식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진손왕의 부모인 진사왕 부부의 이름이 가계도에 한국어로 적혀 있어 이마이 형제는 읽을 수도 없었다. 대리 침례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상황은 아주 급해졌다.
8월 11일, 서울 성전에서 의식을 받기로 한 날까지 3일이 남은 시점에서, 진사왕의 의식은 이미 “이보연”이라는 사람이 예약한 상태여서 이마이 형제가 의식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는 FamilySearch를 통해 제목에 “긴급”을 붙여 이보연 자매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나 회신이 없었고, 페이스북을 검색해서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유타의 어떤 여성에게도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12일이 되었을 때 아내인 마키코 자매는 이렇게 제안했다. “고베 선교부 회장님이었던 매킨타이어 회장님의 아내와 당신이 센다이 선교부 전임 선교사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파펜푸스 자매가 유타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도움을 요청해 봅시다.”
놀랍게도 파펜푸스 자매의 딸이 이보연 자매와 건너서 아는 사이었고, 연락을 받은 이보연 자매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의식에 대해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봉을 받아주신다니 기쁩니다. 저는 곧 의식을 받을 예정이며 여러분이 인봉 의식을 받기 전날에 엔다우먼트 의식을 끝낼 예정입니다.”
이 자매는 자신의 말대로 13일에 진사왕 부부의 엔다우먼트 의식을 완료했다. 그리고 의식 완료 날짜가 찍힌 의식 카드를 사진 찍어서 8월 14일 오전 6시, 이마이 형제가 인봉 의식을 받기로 한 그날 아침에 이마이 형제에게 이메일로 전달했다.
이렇게 조국을 떠나 일본에 온 이마이 형제의 선조들은 2019년 8월 14일에, 고향 땅인 한국 서울 성전에서 인봉되었다. “최 장로님이 집행하시는 가운데 대리 의식이 진행될 때, 주위가 따뜻한 느낌에 감싸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상의 구원 사업을 통해 주님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신다
이마이 형제는 서울 성전에서 조상의 인봉 의식을 마친 지금, 이렇게 말한다. “정말 기쁜 것은 한국 성도인 이보연 자매와 힘을 합쳐 함께 의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일 관계가 최악인 지금, 주님께서 이런 기회를 주신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이 완료되기까지 겪은 우여곡절은 이마이 형제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주님은 조상의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조상의 기록을 찾아 성전에 가져가도록 이미 주님께서 길을 예비하셨습니다.⁴
니파이는 놋쇠판을 얻기 위해 두 번 실패한 뒤 그것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나서 우리에게 행복과 빛을 가져다 주십니다. 가족 역사 사업을 이미 끝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더서에 기록된 대로 ‘믿지 않음의 휘장을 찢어버리[고]’⁵ 앞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가져다주십니다.”
또한 살아 있는 우리들의 구원도 조상의 구원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이마이 형제는 전한다. “그렇게 완고했던 어머니가 개종하셨습니다. 이것은 조상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이라는 나라를 세워 온 많은 훌륭한 조상들이 복음 의식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여 영옥에서 벗어났으며, 이 땅 위의 수백만 후손의 마음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사업을 행한 선조들이 이번에는 우리를 도와 일하여, 제일회장단 제2보좌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님의 예언⁶처럼 큰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이마이 형제는 아내 마키코 자매의 가족 역사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마키코 자매가 태어난 훗카이도를 시작으로, 현 세 곳을 여행할 것이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손이 함께하며, 장막 저편의 사람들이 도울 것이다. 이마이 형제의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주
1. 스펜서 더블유 킴볼, “영원한 일─위험을 무릅쓰리오”, 성도의 벗, 1977 년 5 월호.
2. 이 행사는 다양한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포럼이다. 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진행된 이 회의에서,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 정상 회의에 제출될 권고안이 마련되었다.
3. 지역 연합 청년 대회(AYC)는 8월 15~17일에 한국의 경기대학교 수원 캠퍼스에서 열렸으며 한국, 일본, 괌, 미크로네시아의 청년 약 1300명이 모였다.
4. 니파이전서 3:7 참고
5. 이더서 4:15
6. 1998년 당시 헨리 비 아이어링 장로는 일본의 선교사 훈련원에서 북 아시아 지역의 괄목할 만한 발전을 예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