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문을 열어 주심

십일조는 빈부에 관계없이 모든 개인의 행복과 전세계 교회 회원들의 복지에 근본이 되는 원리입니다.

언제나 이 연단으로 나아 올 때마다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저는 겸손하게 여러분에 앞에 섰습니다. 제가 전해야 하는 모든 말들을 여러분이 영으로 이해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저는 하늘의 문을 여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참담한 경제 대공황이 만연한 1930년대에  당시 소년이었던 저는 할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신앙과 희생에 관한 위대한 교훈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농장에 부과된 세금은 연체되어 있는데,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께서는 한 푼의 돈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가뭄이 들어 풀과 건초가 부족해지자 소와 말들이 죽어 갔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들판에서 얼마라고 할 것도 없는 건초를 거두어들이고 있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건초가 나 있는 들판 한 구석으로 마차를 몰고 가 건초를 마차에 가득 싣고 십일조 창고에 가서 그것을 십일조로 내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당장 우리 가족의 생계가 달린 소들이 굶어 죽어 가는 판에 도대체 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 건초를 십일조로 낼 수 있는 것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저는 주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큰 희생을 할아버지께 바라시는 것일까 하는 의아함마저 품었습니다. 결국 저는 어찌되었던 주님께서 방편을 주실 것이라는 그 분의 큰 신앙에 놀랐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후손들에게 남기신 신앙의 유산은 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자손들의 마음속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주님과 주님의 거룩한 사업을 사랑하셨다는 기억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분은 부자가 되신 적은 없지만, 주님의 품안에서 평온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시절 제가 감독으로 봉사하던 때에, 저의 와드에는 헨리 디 모일 부대관장님이 사셨는데, 저는 그 분을 통해 십일조의 정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십일조 결산을 하던 자리에서 모일 부대관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독님, 저는 온전한 십일조보다 조금 더 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빈부에 관계없이 전세계 모든 교회 회원의 개인의 행복과 복지에 근본이 되는 원리입니다. 십일조는 희생의 원리이며, 또한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초등협회에 다닐 때 저는 십일조에 대한 시를 암송했었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이니?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네. 천 원에서 백 원, 백 원에서 십 원 내는 것임을.” 그러나 저는 십일조의 의미를 할아버지와 모일 부대관장님으로부터 배우고서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일조의 율법은 간단합니다. 자신의 연간 개인 소득에서 십분의 일을 내는 것입니다. (교리와 성약 119:4 참조) 대관장단은 소득이란 수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교회 지침서 1권: 스테이크 부장단 및 감독단 참조(1998), 134) 우리 개인 수입의 십분의 일은 사람과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형식주의적인 법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한 개종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데 있어서 빈부의 차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분의 일만 내면 되는 것이죠. 많이 벌지 못한다 해도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돈을 많이 번다 하더라도 십분의 일만 내면 되고, 적게 번다 하더라도 십분의 일만 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당신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어깨를 펴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세계의 회원들에게, 그들 중 많은 사람이 하루 생활을 연명하기도 힘들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제정한 십일조의 법을 지키도록 촉구하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필리핀의 세부에서 힝클리 대관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설사 [회원들이] 빈곤한 가운데 살더라도…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생활하며, 비록 몇 푼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십일조와 헌물을 낸다면, …밥그릇에 쌀을, 몸에 걸칠 의복을, 머리를 둘 안식처를 갖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밖의 다른 해결책이 없는 줄 압니다.” (성도의 벗, 1997년 8월호, 7쪽)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십일조를 낼 여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니파이일서 3:7 참조) 십일조를 내기 위해서는 우선 신앙의 도약이 있어야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을]…알리라”(요한복음 7:17) 우리는 십일조를 냄으로써 십일조에 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저는 미천한 수입이라도 그 일부를 주님께 되돌리려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교회 회원이 회원 자격을 상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잃게 될 뿐입니다. 주님은 말라기를 통해 물으셨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너희는 …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라기 3:8)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십일조를 주님께 되돌린다면, 주님은 우리들에게 “하늘 문”을 여실 것입니다. 그분의 약속은 확고합니다. “내가 …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10) 비록 십일조에는 세상적이며 영적인 축복이 모두 따르지만, 충실한 자에게 주시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약속은 “너희가 영원한 부를 가지게 될 것”(교리와 성약 38:39)이라는 약속입니다.

히버 제이 그랜트 대관장님은 이 약속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십일조의 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번영이 찾아옵니다. 금전적인 측면만을 생각하고 번영이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번영이란…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간증에서, 복음대로 생활하고 가족도 그와 같이 하도록 격려하는 권세에서의 성장을 말합니다. 그러한 것이 가장 참된 의미에서의 번영입니다.” (복음 표준, 지 호머 두르함 편저(1941), 59쪽)

야에코 세키 자매는 이 소중한 약속을 일부 체험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저는 가족과 함께 일본 알프스 국립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넷째 아이를 가진 상태라 조금 피로함을 느껴 나무 아래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가족이 처한 재정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해져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주님, 우리는 완전한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희생해 왔습니다. 언제 저희 가족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셔서 저희의 짐을 가볍게 하시겠나이까?’

“저는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함께 놀고 있던 남편과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 문득 저는 제가 풍성한 축복을 받았으며 하늘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축복은 제 가족이라는 영의 증거를 느꼈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이미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일조가 희생이라 하기보다는 축복이라 생각하거나 심지어 특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회원들이 갖는 위대한 축복 가운데 하나는 해마다 한 번 감독과 만나 십일조를 결산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냈다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것은 감독에게도 또한 놀라운 축복입니다. 저는 대가족을 거느린 우리 와드의 한 형제가 자녀들을 모두 데리고 십일조 결산을 하러 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형제는 가장 어린 자녀로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씩 자신의 십일조가 완전한 것인지를 감독에게 보고하게 했습니다. 모든 자녀들이 보고하고 나자, 그는 아내와 자신의 가족을 위한 보고를 했습니다. 이 가족은 그들의 충실함에 따른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의 십일조가 1838년에 예언자 요셉 스미스를 통해 주어진 계시에서 공포된 그대로 집행되고 있다고 안심해도 됩니다. 교리와 성약 120편에 나와 있듯이 지명된 18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만나 이 신성한 기금을 집행합니다. 그 평의회에 참여하는 우리들은 이 신성한 책임이 “저들에게 고하는”(교리와 성약 120편) 주님의 음성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힝클리 대관장님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성전을 존재하게 하기 위해 성전 건립을 발표하셨습니다. 세계의 모든 곳에서 성전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성전이 영적인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파멸시키려는 욕망을 가진 사탄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성전을 갖기를 원하는 교회에서 고립된 지역에 사는 교회 회원들에게, 저는 먼저 여러분이 성전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십일조를 내는 신앙을 보이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커틀랜드에서 교회 장로들에게 계시하신 대로, “인자가 올 때까지는 오늘이라 부르리니, 진실로 지금은 희생의 날이요, 나의 백성의 십일조의 날이라”(교리와 성약 64:23)

주님은 헌물이란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셨는데, 이는 여러 헌물을 뜻합니다. 주님은 충실함을 나타내는 조건으로 십일조와 금식 헌금을 내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울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명이나 회비 혹은 교칙과 같은 명목이 아닌, 또 다른 헌금을 낼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헌금으로는 일반 선교사 기금, 인도주의적 지원, 몰몬경 기금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힝클리 대관장님이 발표하신 새로운 성전 건축에 자발적으로 기여할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교회의 일반 성전 기금을 내고자 많은 희생을 하신 한 사람으로부터 익명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위해 돈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렇게 하기를 보류하고 성전 기금으로 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목표한 것을 이루기까지는 새 옷이며 새 신발이며 책이며 머리 손질이며 목걸이 등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큰 희생이 되리라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기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상과 성취가 따르는 경험이었습니다.” 

예언자 요셉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서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종교는 생명과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신앙을 갖게 할 만한 충분한 권세를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희생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러한 신앙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러한 희생에 의지해야만 이러한 신앙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신앙 강화 (1985), 69∼70쪽)

우리가 내는 헌금은 우리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됩니다. 최근에 저는 제가 속한 와드의 성찬식에 참석했습니다.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몇몇 사람이 헌금 봉투를 감독단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들은 만면에 웃음을 띄며 행복해 했습니다. 이 봉투 안에는 주님의 축복에 대한 겸손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이 기쁘게 내는 십일조와 기타 헌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지닌 신앙의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이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속도로 세상의 많은 곳에서, 특별히 경제적인 표준이 높지도 않으며, 새로운 회원들이 신앙의 원리 및 축복과의 관계를 아직도 배우고 있는 국가에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충실한 회원이 되는 데는 희생과 헌납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쁨과 세속적인 소유가 인생의 주요한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은사에는 우리의 모든 소유와 자신의 존재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역병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주님은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다윗이 아라우나를 만나러 갔을 때, 아라우나는 왕이 왜 오고 있는지를 알고는 관대하게도 희생 제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왕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대답은 의미 심장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사무엘하 24:24)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타작 마당을 사서 희생을 드리자 역병이 그쳤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우리는 수많은 형태의 폭력과 악과 사악함이라는 역병이 넘쳐 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성약을 지키고 십일조와 헌물을 내는 사람들은 현대의 이러한 치명적인 여러 악으로부터 보다 굳건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가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희생을 통해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세계 종교의 경향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것을 아무런 노력이나 희생도 하지 않고 값싸게 얻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조금 갖는 것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에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이 되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노력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종교는 일요일만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에는 일상 생활에서 모범적인 행동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또한 부름을 받아들이고 충실하게 그 부름에 봉사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뿐만 아니라 회원들이 고결한 성품과 성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정직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성소가 되고 사랑이 가득한 곳이 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세상 악의 끊임없는 폭격에 맞서 싸우는 힘든 싸움을 의미합니다. 때로 회원이 된다는 것은 인기를 잃거나 정치적인 공정에 영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거룩한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음을 명예롭게 여기며 특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세계 만방으로 널리 영적인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할 위대한 시기입니다. 참으로 바라보기에 경이로울 뿐입니다. 이 사업은 하나님의 사업입니다. 이 사업은 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되고 있습니다. 고든 비 힝클리 대관장님은 예언자, 선견자, 계시자이십니다. 저는 힝클리 대관장의 영감받은 지도력이 모든 인류에게 축복을 주고 있음을 믿습니다. 

최대의 희생은 바로 구세주께서 직접 자신의 생명을 드린 희생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 개개인은 “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셨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저는 예수가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며, 우리 영혼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구세주요 인류의 구속주가 된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이 모든 것을 그분의 거룩한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