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소망

진정한 소망은 원하는 바를 묵상만 하는 것보다 훨씬 차원이 높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척추를 약하게 하지 않으며, 곧게 만들어 줍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머리가 여전히 조금 윤이 납니다만, 제 이발소 친구들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연차 대회 때마다 머리 모양이 달라지긴 해도 효과 좋은 치료를 더 많이 받고 있다는 표시가 되겠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이 넘칩니다. 먼저는 주님에게요, 다음은 제 특별한 아내와 가족, 유능하고 자상한 의사들과 간호사들, 절 위해 기도해 주시는 너무나 많은 친구와 회원들에게 그렇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 이유 때문에, 오늘의 사회는 희망차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매우 미묘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소망이라는 말을 쓰는 데는 우리가 정해진 시간에 일정 목표점에 도달하기를 얼마나 ‘원하는가’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경제가 개선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방문을 “소망”합니다. 그러한 소망은 진지하지만 단기적인 소망의 전형입니다. 인생의 절망은 흔히 단기적 소망이 실패한 데서 연유합니다. 그 대신, 저는 궁극적인 소망의 절대 필요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궁극적인 소망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 궁극적인 소망은 예수님과, 그리고 위대한 속죄로 인한 축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축복이란 만민의 부활을 가져온 축복이요, 자유케 하는 회개를 할 수 있게 해준 축복이며, 경전에서 말한 대로 “온전한 희망의 밝은 빛”을 가능케 한 축복입니다.

모로나이는 이렇게 확인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소망을 가져야 하겠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소망을 할 것이니[라].”(모로나이서 7:40-41, 또한 앨마서 27:28 참조) 따라서 진정한 소망은 변덕스러운 것들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 불멸한 것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연히, “소망”은 다른 복음 교리, 특히 신앙 및 인내와 서로 얽혀 있습니다.

의심과 절망과 탈감각이 한 묶음이듯이, 신앙과 소망과 사랑과 인내가 한 묶음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성품들은 꾸준히 정성을 기울여 배양해야 하는 반면, 의심과 절망은 민들레와 같아서 별로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잘 싹이 트고 번식해 나갑니다. 슬프게도, 좌절은 육적인 사람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옵니다.

예를 들어, 인내가 있으면 우리는 평탄하지 않은 인생사를 보다 평탄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소망은 항상 상호 작용성이 있어서, 항상 쉽게, 혹은 정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소망에서 기대하는 바는 “분명히” 참됩니다. 그래도 회복된 복음의 가르침을 보면, 소망은 신앙과 유사하지만, 때때로 더 넓은 영역을 갖습니다. 신앙을 보면, 이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히브리서 11:1, 또한 이더서 12:6, 요셉 스미스 역 히브리서 11:1 참조) 그런데 소망은 때때로 신앙이 갖는 현재의 그러한 경계 너머까지 영역을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저 진정한 소망의 “나팔 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을 집합시킬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몇몇 동료들은 졸거나 달아나도, “산 소망”은 여전히 우리 앞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찬송가, 6장, 베드로전서 1:3 참조) 소망은 풀죽어 있던 제자들이 기대에 부풀어서 서둘러 텅 빈 동산 무덤으로 달려가게 만들었습니다.(마가복음 16:1-8, 누가복음 24:8-12 참조) 소망은 한 선지자가 사람의 손바닥보다도 커보이지 않던 먼 곳의 구름에서 생명을 구해 주는 비를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한 궁극적인 소망은 “영혼의 닻”을 이루고 있으며, 성신의 은사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 보유하게 됩니다.(히브리서 6:19, 또한 앨마서 25:16; 이더서 12:9 참조) 대조적으로, 불사 불멸에 대한 기대도 없이 인생을 보게 되면 소망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책임감마저도 쇠약해질 수 있습니다.(고린도전서 5:19, 앨마서 30:18 참조)

당연히, 인간 세상에는 깊은 신앙심의 영향도 받지 않고, 혹은 그 뜻을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세상일만 해나가지만, 그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빛”을 끌어 와서, 어느 정도까지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84:46, 모로나이서 7:16, 요한복음 1:9 참조) 바람직하게도, 세상에는 천성적으로 영적인 것을 느낄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신을 지탱해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소망은 모순되고 예측하지 못한 사건에 너무 쉽게 상처를 입기 때문에, 세상에는 인생사에 대한 절망감이 더욱 팽배해지고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현재 정치계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꾸 쌓여 가는 사회의 다른 걱정거리들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염려가 없는 사람들조차도 보편적인 절망감을 느낍니다. 많은 이들이 패트릭 모니헌 상원 의원이 명명한 “부도덕성의 합리화”에 편승함에 따라, 차가운 세속주의가 그 절망감의 일부를 유도하고 있습니다.(부도덕성의 합리화, 미국의 학자, 1993년 겨울호, 17쪽) 참으로 많은 절망은 부도덕에서 유발됩니다. 그 부도덕은 하나님이 정의내리신 것입니다. 

불만족과 대립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로 인한 소망의 상실은 당연히 이기심의 팽배를 촉진시키는데, 많은 이들이 체념하여 자기 본위로 돌아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소망의 옷이 벗겨져 버리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면서 “내일 죽을 터이니”라고 이유를 둘러대고, “사람은 죽으면 그만인 것이다”라는 그릇된 결론을 내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32, 앨마서 30:18) 

장차 닥칠 어려움들을 탄식해 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유용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 사건들이 결국은 보다 훌륭한 하나님의 방법과 그분의 왕국에 관심을 갖게 하여 “해같이 아름답고 달같이 맑게”(교리와 성약 105:31)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계속 선택하겠지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궁극적인 결과는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서둘러 무르익어 가는 과정에서, 가라지가 항상 더욱 가라지처럼 보이고 있는 사실을 두고 놀라지 맙시다.  “민족들이… 혼란한 중에 곤고”해지는 이 시기 동안에는, 실제로 그 혼란 때문에 유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악마의 왕국이 반드시 흔들릴 것임이요, 악마에게 속한 자들을 깨우쳐 회개하게 함이 필요함이라.”(니파이이서 28:19)

사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추측 밖에 할 수 없지만, 그처럼 “깨우치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편, 궁극적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다음의 간결한 구절이 주는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만사는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지느니라.”(교리와 성약 64:32)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이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 때에는, 현재의 인간의 수준에서 “소망”의 상태를 참작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당연히 경전에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백성이 모두 바르지 않은 것을 내세우는 일은 드문 일”(모사이야서 29:26)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회의 태도에서 거대한 변화가 정말로 일어나면, 그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모사이야서 29:26, 27 참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때에만 정말 필요한 방향과 올바른 궤도를 파악할 수 있으며, “희망의 밝은 빛” (니파이이서 31:20)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선한 대업이 세상적인 면에서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때에도 우리로 하여금 그 대업에 “힘써 노력하게“ 합니다.(교리와 성약 58:27 참조) 마찬가지로, 진정한 소망은 원하는 바를 묵상만 하는 것보다 훨씬 차원이 높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척추를 약하게 하지 않으며, 곧게 만들어 줍니다. 소망은 경솔하지 않고 잔잔한 것이며, 미숙함 없이 열망하는 것이며, 자기 도취 없이 기쁜 마음으로 꾸준한 것입니다. 소망은 역경을 이겨내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 끝까지 “잘 견디어”(교리와 성약 121:8) 내겠다는 결의를 하게 하는 현실적인 기대입니다.

“산” 성품인 소망은 장례식에서도 우리 곁에 조용히 서 있습니다. 우리 눈에 눈물이 나오지만, 절망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애절한 이별이 더욱 실감 나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그러한 석별의 눈물은 변화되어서, 머지않아 영광스러운 기대에 대한 눈물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소망은 현란하고 공공연한 광신 행위가 아니라, 조용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촉진시킵니다. 핀리 피터 던은 이렇게 재미있게 말했습니다. “광신자란 자신의 생각에 주님도 사정을 알면 똑같이 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세 번째- 최고, 사람들이 말하는 최고의 것 637가지, 로버트 바이언 편[1986년], 549번)

진실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시기를 제대로 인내하지 못하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고작 손목시계를 차고 있으면서 우주의 시계와 달력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훈계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욱 그분과 그분의 아들처럼 되어서 본향에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이 발전의 과정에는 우리에게 약점을 보여 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궁극적인 소망이 있다면 온유해질 것입니다. 그분의 도움이 있으면 그러한 약점까지 장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더서 12:27 참조) 

그러나 자신의 약점을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약점들은 인생의 상황에 의해 정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과정의 일환이며,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행복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더욱이, 헨리 비 아이어링 장로님께서는 이처럼 현명한 권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훈계보다 칭찬을 원한다면, 둘 다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선생을 택하고 지키기 위하여”, 1993년 연례 대학 대회에서 전한 말씀, 브리감 영 대학교[1993년], 42쪽)

소망을 갖고 전진해 감으로써, 우리는 반복적으로, 즐겁게, 어제는 멀리만 보이던 지평선 위에 서 있을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 훨씬 더 큰 소망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어떻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로마서 5:3-4)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지난날이 입증해 주는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노래부릅니다.(찬송가, 6장)

당연히, 참된 소망을 가진 사람들도 자신의 개인 상황이 때때로 만화경처럼 흔들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변화 무쌍한 일시적 상황에서도 “신앙의 눈”(앨마서 5:15)을 가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참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주위의 부패 속에서도 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안정되어 있는데, 여호수아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우리가 세상 전부를 고칠 수는 없겠지만, 우리 가정에서 잘못되어 있는 점들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톨키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할 책임은 없지만, 여기에 있는 동안 그것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즉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악을 일소하여 후손들이 깨끗한 세상을 살 수 있게 할 책임은 있다.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한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왕의 환국[1965년], 190쪽)

형제 자매 여러분, 가족의 범위에서 볼 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깨끗한 세상”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만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소망도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가진 밭이 어떻든지, 우리는 바울의 말대로 “소망을 가지고 갈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일이 어제의 볼모가 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이 식어도 진정하고 궁극적인 소망은 우리가 더욱 사랑하게 해줍니다.(마태복음 24:12 참조) 세상의 죄악이 무르익을 때에도, 우리는 더욱 거룩해질 수 있으며, 경솔하고 거칠어져 가는 세상에서 더욱 정중하고 인내심 있게 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공포에 휩싸여도 더욱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모로나이서 20:22 참조)

소망은 쉽게 전파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베드로전서 3:15)할 수 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브리감 영 대관장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지식을 나누지 않고 선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시야와 느낌이 줄어들게 된다”고 하셨습니다.(데져렛 뉴스 위클리, 1855년 5월 9일, 68쪽)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들을 찾는다면, 성신이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들”을 보여 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신의 영감 어린 역할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니파이이서 32:5 참조) 소망을 잃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까운 친척에게, 낙담해 있는 이웃에게, 또는 길 모퉁이의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양로원의 노인 환자를 도움으로써, 또는 바쁘고 일에 지쳐 있는 부모님을 위해 기꺼이 심부름함으로써, 많은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에 관하여 간단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역시 소망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한편, 세상이 세속적이고 개방적인 사람들과 영적인 가치들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더욱 양극화될 것이라는 점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시야가 줄어들지 않고, 소망으로 인해 축복을 받은 우리 제자들은 어떤 이유로든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골로새서 1:23)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손길을 내밉시다.

존 웨슬리가 작곡한 찬송가, “와서 새로워지라”(교리와 성약 121:8)에서처럼, 우리 모두 다 알듯이 우리의 삶과 세월은 빠른 속도로 흘러가며, 우리가 빨리 지나가게 되는 그 길은 매우 여러 갈래입니다. 그러나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로써” 모든 것을 이겨낸 사람들은 “잘하였도다 내 기쁨에 참여하여 내 보좌에 앉으라”(영문 찬송가, 217장 참조)라는 영광된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소망의 복음을 통해, 하루의 이 영광된 순간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를,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