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부상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 수요가 급등하자, 미네소타 대학 외과 훈련 5년차이던 한 청년이 입대를 자원한다. 젊은 청년의 이름은 러셀 엠 넬슨이었다.
그와 그의 아내 단첼이 미국 중서부를 떠나 미국 동부에 위치한 워싱턴 D.C 월터 리드 육군 병원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는 한국 전쟁이 전개되던 1951년이었다. 넬슨 중위는 워싱턴 D.C. 월터 리드 육군 병원에서 복무를 시작했으며, 곧 그와 동료들은 한국 현지로 파병된다.
참전 당시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최근, 러셀 엠 넬슨 회장이 월터 리드 100주년 기념 행사를 맞아 당시 월터 리드 육군 병원(현재 육군 의료 센터)을 다시 찾았다. 그는 강연을 통해 직원, 의대생 및 환자들에게 복무 당시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2019년 현충일을 맞으며, 러셀 엠 넬슨 회장의 군 복무 이야기를 전한다.
사진: 군 복무 중 제복을 입은 러셀 엠 넬슨 회장. 그는 1951년에서 1953년까지 육군 의무대에서 중위로 복무했다.(러셀 엠 넬슨 회장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
“갑자기 많은 기억이 떠오릅니다.”라고 말한 넬슨 회장은 월터 리드 병원을 다시 찾은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이곳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저의 자대였습니다. … 이후 저는 대위로 진급했는데, 공훈을 세워서가 아니라 중위 만기인 20개월을 채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자녀 중 두 명이 이곳 월터 리드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퍼싱 장군의 특실에서 편안하게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넬슨 회장은 “(자신이 낮은 계급의 외과의였음에도) 병원에서 맡은 직무 덕분에 연령과 계급이 더 높은 사람들의 외과 수술을 지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해리 에스 트루먼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월리스 그레이엄 소장과 어울릴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진: 중위 시절의 러셀 엠 넬슨 회장. 그는 이후 대위가 되었다. 1951년 6월에, 그가 속한 의료팀은 강원도 홍천에 있던 8209 병원을 포함, 다섯 개의 육군 이동 외과 병원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당시 부상자 치료법을 바꾸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러셀 엠 넬슨 회장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
사진: 러셀 엠 넬슨 회장은 육군 의무대에서 복무하며 다섯 곳의 육군 이동 외과 병원을 포함, 한국 내 모든 의료 시설을 순회했다. 미 육군 공병대가 건설한 브로큰 하트 3번 다리에서 넬슨 회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러셀 엠 넬슨 회장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
사진: 러셀 엠 넬슨 회장은 복무 당시, 국내 여러 지역을 방문하며 한국인들을 만났다.(러셀 엠 넬슨 회장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
그는 한국인과의 만남에 대해 전하며, “(한국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면 그 특권을 누렸습니다. 물론, 소통의 장벽은 있었죠. 우리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도 우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들 영혼의 고귀함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넬슨 회장은 한국 전쟁에서 적의 포격을 받았으나, “다행히도” 포탄이 그를 비껴갔다고 전했다.
넬슨 회장은 한국 전쟁 초기이던 1951년에 월터 리드 대학원장인 윌리엄 에스 스톤 대령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어떻게 부상자 치료에 혁신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들은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지중해 전선에서의 임상 연구 경험이 있는 지도자를 한 사람 찾아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피오린도 에이 시메오네였고, 클리블랜드에 있는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의 외과 교수였습니다. 그가 이끌어야 하는 4명으로 구성된 팀은 한국의 전선을 방문해야 했는데, 그 팀의 목적은 외과 군의관이 직면하는 주요 문제를 파악하고 전투 지역에 연구 프로그램을 설립하는 것이 가능하고 타당한지를 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메오네 박사 외에도 커티스 피 아츠 소령, 조지 이 슈라이너 대위, 러셀 엠 넬슨 중위도 이 팀에 포함되었습니다.”
넬슨 회장은 57년 전에 직접 찍은 영상과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면서 복무 중 5개의 육군 이동 외과 병원, 2개의 주요 후송 병원, 야전 병원, 전쟁 포로 수용소, 일본, 하와이 및 미국 본토의 대규모 후송 병원 등을 방문했던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진: 부상자들이 자신들을 다른 시설로 이송해 줄 구급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러셀 엠 넬슨 회장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
사진: 의료팀원들의 사진. 앞줄에 샘 에프 실리 장군, 에드윈 제이 풀라스키 중령, 뒷줄에 레스터 알 소바주, 지그문트 에이 웨솔로스키, 러셀 엠 넬슨, 앨튼 오츠너 이세, 헨리 에이치 볼치.( 러셀 엠 넬슨 회장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
그가 속한 의료팀이 당시 작성한 연구 보고서는 상처 감염, 탈수증, 외상 후 신부전 및 혈관 손상 등의 문제점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발견은 부상자 치료법을 즉각적으로 변화시켰을뿐 아니라 추가적인 연구로 이어졌다.
'역사와 추억은 미래를 향상시키기 위한 현재의 노력과 합쳐질 때 가장 큰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초기의 경험은 후에 넬슨 회장이 의학에 기여하는 데 발판이 되었다. 심혈관 수술의 선구자인 넬슨 회장은 인공 심폐기를 개발한 팀에 참여했는데, 이 심폐기는 1951년 3월에 있었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심장 절개 수술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군 복무 후 넬슨 회장은 보스턴 매사추세츠 종합 병원과 미니애폴리스에 위치한 미네소타 대학에서 계속 수련을 받아 이후 유타 대학교 및 LDS 병원에서 저명하고 혁신적인 흉부외과 의사가 되었다. 그는 유타주에서 최초로 심폐기로 심장 절개 수술을 집도한 의사였다. 그는 1984년 4월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으로 부름받았다.
사진: 러셀 엠 넬슨 회장이 자신의 사진과 영상을 슬라이드로 보여 주며 군에서의 경험을 들려주고 있다.(촬영: 페이지 존슨)
사진: 넬슨 회장과 찰스 하월 군목(촬영: 페이지 존슨)
그의 강연 후, 많은 청중이 넬슨 회장에게 의료 및 군사적 유산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한국계 미국인이자 내과 의사인 이희춘 박사 또한 그에게 조국인 한국을 위해 봉사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북대서양 지역 의무사령부의 찰스 하월 군목은 경의를 담아 넬슨 회장를 “연로한 전사”라고 칭했으며, 현재 센터에서 복무 중인 이들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일에서 그들의 선배들처럼 충실하기를” 기도했다. 월터 리드 보건 의료 시스템의 사령관이자 의학 박사인 노벨 반 쿠츠 대령 또한 넬슨 회장을 '월터 리드 가족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환영했고, 그의 봉사를 기리기 위해 사령관 기념주화를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