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자립—나 자신에게서 찾는다

영적 자립—나 자신에게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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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회장단 메시지 - 지역 계획 2016 시리즈

영적 자립—나 자신에게서 찾는다

북 아시아 지역 회장단 제1보좌 가즈히코 야마시타 장로가 지역 계획 목표 중 하나인 자립에 대하여 말씀한다.

질문. 지역 계획 목표 가운데 “자립”을 포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야마시타 장로: 현대의 선지자, 특별히 제일회장단이 이것을 강하게 권고하고 계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는 물질적인 자립뿐만 아니라, 진정한 개종 및 영적 자립에서 오는 자립까지 포함합니다. 저는 복지 원리에도 우리 자신의 영적 자립에 대한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자립 = 스스로 답을 찾는 능력

저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사실상 저는 개종하고 나서 곧바로 영적으로 자립한 것 같지 않습니다. 좀 더 부연하면, 처음에 저는 다른 사람들의 간증에 의존했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이 있었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었지만, 갖가지 도전 앞에 제 신앙은 여전히 흔들렸습니다. 저는 완전히 믿지 못한 채로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그와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자립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경전을 공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행사하며 기도를 드리는 동안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통하여 답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정기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자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해답을 찾을 능력이 없거나 해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자립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려운 고민이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간단한 과정을 거쳐 해결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은 분명 영적인 자립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기에 앞서, 먼저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며, 경전을 펴 보고, 그 문제에 관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할 수 있느냐가 여러분의 영적 성숙함의 수준을 보여 주는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답을 구하는 것이 시작점이다

청소년이 이해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니파이와 조셉 스미스의 경우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기억하는 첫 번째 성구 익히기 구절은 니파이전서 3장 7절입니다. “내가 가서 주께서 명하신 일들을 행하겠나이다. 이는 주께서 사람의 자녀들이 그가 명하시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길을 예비하실 것이 아니고는 아무 명령도 주지 아니하심을 내가 앎이니이다.” 저는 니파이가 그의 형 레이맨, 레뮤엘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청소년들이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신의 간증을 얻은 니파이는 스스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자신의 간증을 얻고 나서 진정한 영적 자립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공식입니다.

조셉 스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실제로 어린 소년 조셉의 행동이 이와 같은 원리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간증을 구했습니다.

반면에 레이맨과 레뮤엘은 동생 니파이와 아버지에 대해 불평만 하였을 뿐 주님에게서 답을 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1 저는 이것이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중요하고도 정말로 단순한 이 원리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가 진정 영적으로 자립을 하려면 현세에서나 다음 생에서나 이와 같이 스스로 답을 구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여전히 계속하여 창조하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가 완전히 낙관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곧바로 실망을 하고 시종일관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선교사로서 성공을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는 그와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스스로 간증을 갖게 될 때 진정한 영적 자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간증은 여기저기 분리된 단편적인 경험에서뿐만 아니라, 영생을 향한 인생 여정 전체에 걸쳐 축적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나에게 확고한 간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답변. 야마시타 장로: 십이사도 정원회의 홀런드 장로님은 최근 연차 대회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이나 의심, 고난의 시기가 오면, 먼저 여러분에게 이미 있는 신앙을 붙드십시오. …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굳게 붙들고 더 많은 지식이 주어질 때까지 굳건하게 견디십시오.”2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조셉 스미스는 참으로 우리의 선지자입니다. 몰몬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책입니다. 이와 같은 기본적 믿음이 참되다고 생각하면 그 신앙을 굳게 붙드십시오. 우리에게 확신이 없고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부분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확고하게 붙잡으십시오. 주변의 회원들과 부모님이 청소년을 북돋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종을 했을 때 저는 선교사들에게서 다음과 같이 간증을 얻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1. 기도하며 경전을 공부한다. 2.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3. 배운 바를 실천한다. 우흐트도르프 회장님 역시 간증을 얻는 법을 피력하였습니다. 1. 소망을 갖는다. 2. 경전을 연구한다. 3. 주님의 뜻을 실행한다. 4. 계명을 지킨다. 5. 상고하고 금식한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 않습니까? 스스로 계시를 구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이와 같은 단순한 것들을 계속 반복합니다.

질문. 청소년들이 스스로 나서서 간증을 구하게 하려면 어떻게 그들을 지도해야 합니까?

주님의 방법으로 이끈다

답변. 야마시타 장로: 제가 대학에서 오랫동안 가르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젊은이들이 생각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어쩌면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교육 현실에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도록 훈련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젊은 사람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지만, 저는 그것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젊은이들은 그들 안에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지닌 그 힘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먼저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찬식 모임에서 더 많은 연사들이 꿈이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날카로운 꾸짖음에 집중하기보다는 부드러운 사랑으로 회원들을 보살피는 것을 더 강조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여러 가지 지침과 표준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지침과 표준을 밀어붙여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주님의 지도 방법이 아닙니다. 가령 선도평의회에서 처음부터 미리 결론을 내려 두고서 시작한다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인도하여 구해 낼 수 없습니다.

저는 교사들이 교리와 성약 50편 22절의 “둘 다 교화되[는]” 원리를 더 잘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가르치는 일은 단지 한 사람이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미국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대학에서 가르칠 때 다루곤 했던 “코칭 철학”은 운동 선수들을 가르치는 코치들의 철학이나 아이디어인데, 미국에서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이 방법 역시 군대처럼 명령하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이 방법을 선호하는 이유는 즉각적인 효과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주님의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그것은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래 기다려야 하며 이따금 답을 받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그만큼 희망을 갖고 참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마침내 운동 선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며 독립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기다리십니다. 복음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성역(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 선수는 명령식으로 할 때 좀처럼 독립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진정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제대로 지도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성가시다며 흔히 우리는 쉬운 방식(명령 스타일)을 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가르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자립하도록 양육하려면 주님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특히 복음을 아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한가운데 두는 것에 관하여 서로 가르치며 배워야 합니다.
 


자립이란 다른 사람이 잡아 주는 물고기를 받는게 아니라 물고기를 직접 잡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자립 또한 다른 사람의 간증에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경전을 공부하고 기도함으로써 응답을 받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립으로 이끌어 주는 행동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니파이에게는 이미 간증이 있었기에, 다시 말해서, 그는 이미 영적으로 자립하였기에 행동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이나 행동, 그중 어떤 것이 먼저 오는지 생각해 볼 때, 저는 먼저 오는 것은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베드나 장로님은 교회 교육 기구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를 가지고서 요단강을 건너려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먼저 강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사람들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물이 말라서 길이 준비된 것은 그들이 물에 들어선 다음이었습니다.3

복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 적용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나 장로님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행동과 힘의 원천입니다.

첫걸음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태도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기다린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역 비전의 핵심어들은 동사입니다. 행동을 취하며 실천을 하는 것은 자립을 향한 첫걸음입니다. 지역 회장단은 지역 계획이 우리를 강화하고, 우리가 영적으로 자립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함께 갑시다

제가 젊었을 때부터 복음대로 살고자 할 때, 스스로를 위해 설정한 기본 신조는 “용기를 갖자”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자” “앞으로 나아가자”였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용기가 있다면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저는 부모나 어른들이 “함께 가자”고 말하며 청소년들에게 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단강을 건넌 사람들은 홀로 걸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걸어 나왔습니다. “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라고 노래한 우리의 개척자 선조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을 바라보고 신뢰하며 끝까지 긍정적으로 걸으라고 하십니다. 저는 힝클리 회장님이나 몬슨 회장님과 같은 낙관주의자의 긍정적 모범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청소년들이 용기를 갖도록 돕는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는 한 가지 방안으로 “함께 가자”는 이 개념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연차 대회 말씀을 듣습니다. 거기서 우리 지도자들은 언제나 상의하달식으로 우리를 나무라기보다는 “그 일을 함께 합시다”라고 말하며 따뜻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권유합니다. 주님도 그와 같습니다. “와서 나를 따르라”라는 것은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초대입니다.

낙관적인 태도로 자녀들을 가르친다

결혼한 부부가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자녀들의 영적 자립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참석하는 이유를 모른 채 그저 부모를 따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자녀들에게 풍성한 사랑을 보여 준다면, 마침내 자녀들의 마음은 깨우침을 받아서 부모에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때, 자녀들이 뒤에서 보고 배우는 것은 우리 교회의 가르침과 완전히 반대가 될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부모가 경전을 읽을 때 자녀들에게 어떤 종류의 얼굴 표정이나 태도, 행동을 보이는지 고려하십시오.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지, 경전 공부는 힘든 일이야.’ 혹시 우리의 태도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가야 하니까 가는 것뿐이지 나는 피곤해.’ 혹시 일요일 교회에 갈 때 우리는 그러한 태도입니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태도를 보는 자녀들이 배우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지 의문이 듭니다.

아쉽게도 저의 부모님은 교회 회원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대신 우리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그와 같이 긍정적인 태도와 낙관적인 행동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말보다는 모범으로 더 많이 배웁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자립의 소망

아울러 저는 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 소망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성인, 특히 부모들은 청소년을 향하여 희망을 품습니다. 저는 세상 풍조에 휘둘리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굳게 서겠다는 높은 희망과 소망으로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주 사소한 문제로 다른 사람들을 거듭 나무라며, 역경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방법과 정반대입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주님의 속죄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우리의 중심에 둔다면, 우리는 주님의 속죄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깨끗해지며, 위안을 받고, 강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날마다 속죄의 권능을 느낍니다. 청소년들도 그것을 구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부모들은 포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일부가 회원인 가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자립은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이 됩니다.

높이 뛰려면 어떻게 합니까? 맞습니다. 무릎을 굽힙니다. 우리 몸을 작게 만드는 만큼 더 높이 뛸 수 있습니다. 그냥 똑바로 선 채로 높이 뛸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뭔가에 짓눌리거나 낙담에 빠질 때, 그와 같은 난관을 최선의 높이뛰기 준비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는 소망을 잃은 채로 우리 자신이 자꾸만 작아지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상 위기는 힘을 축적하는 기회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와 같은 태도를 견지한다면 진정한 영적 자립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         니파이전서 15:8~9 참조.

       2.         제프리 알 홀런드, “내가 믿나이다”, 리아호나, 2013년 5월호, 93쪽 참조.

       3.         여호수아 3:8~4:18 참조, 또한 동영상 링크(영어) http://lds.org/go/43S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