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으로 – 역사와 추억의 발자취   

제 11화: 게일 이 카, 주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주께서 정하신 사람, 제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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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 2021년 9월

  • 글: 김대연 (한국 교회 역사 고문)
  • 삽화: 설경민 (한국 교회역사위원회, 일러스트레이터)

게일 에드워드 카 형제는 처음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으로, 그다음에는 북극동 선교부 선교사로 일본에서 봉사하던 중에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한국 지방부 관리 장로로서 교회 재단법인 설립에 기여한 뒤, 마침내 새로 조직된 한국 선교부의 회장으로서 가족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와서 이곳에서 아들을 낳고 척박했던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며 복음 전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와 한국의 인연을 2부에 걸쳐 살펴보기로 한다. 

 

6. 포도원의 척박한 땅에서 있었던 일들

(1) 당신네 회장을 데리고 나가 주세요

“[한국 선교부 조직 후 최초로 도착하는] 신임 선교사들이 오기 몇 주 전, 카 회장이 나를 시내의 외무부로 보내어 발급이 지연되고 있던 선교사들의 비자를 알아보라고 하신 기억이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서류 더미 속에 비자 신청서가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담당자에게 ‘기름칠’을 하기 전까지는 일이 처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카 회장께 이 일을 보고했다. 그런 다음, 우리 두 사람은 즉시 시내로 갔는데, 카 회장은 담당자에게 이 문제를 대놓고 따지셨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를 일본어로 했기 때문에 상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결국, 그 담당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네 회장을 데라고 나가 주세요, 비자는 곧 처리될 겁니다.’ 뇌물을 주지 않고도 일이 처리되었다. 그 일 이후로 선교사 비자와 관련해서는 어떠한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Korean Mission Journals, Darryl W. Harris, 69쪽)

 

(2) 내 뒤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있습니다

로스 에이치 콜 형제는 1964년에 한국 선교부 회장단 제2보좌로 봉사하고 있을 때 했던 경험을 이렇게 회상했다.

“카 회장의 부탁으로 카 회장과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을 모시고 서울의 모처에 들렀다. 도착해서 그곳을 둘러본 뒤 우리는 선교 본부로 돌아가기 위해 선교부 차로 향했다. 그때 술에 취한 듯 보이는 한국인 두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미국인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문제삼으며 화를 냈다.

그중 한 사람은 돈을 내놓으라고 우리를 겁박했다. 그러자 카 회장이 힝클리 장로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일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몇 사람이 우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카 회장이 말을 마치자, 그 불쾌한 사람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선교부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힝클리 장로께서 카 회장에게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으셨다. 카 회장은 자기가 한국 전쟁 당시에 미군으로 복무했고 그 사람의 팔다리를 쉽게 부러뜨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본인 뒤에 서 있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며 자기는 그분을 경호하고 호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말했다고 했다. 카 회장은 그 사람에게 동료를 데리고 조용히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힝클리 장로는 이런 기분 좋은 경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이에 대해 내게 언급하셨다.”(“Gail Edward Carr”, Ross H. Cole, 6쪽)

 

(3) 신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

로스 에이치 콜 형제는 카 회장이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대단한 능력과 수용력을 지녔다고 회상했다.

“카 회장은 청운동의 선교 본부 경내에서 밤중에 불빛을 보거나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게 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나에게 동반자와 함께 선교부 회장 보좌 사무실에서 자면서 도둑의 침입을 미연에 방지해 주면 좋겠다고 부탁하셨다.

사무실에서 자고 있으면, 그 앞을 재빨리 지나쳐 달려가면서 소리를 지르거나 크게 말하는 성인이나 아이들 때문에 잠에서 깼던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기억이 난다. 카 선교부 회장은 그 어두운 밤에 선교 본부 경내에서 그 사람들을 쫓고 계셨다. 그분은 신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선교 사업 기간에 21개월을 선교 본부에서 보냈다. 마지막 해는 선교부 회장단 제1보좌로 봉사했다. 나는 카 회장과 함께 일요일에 한국 군인 지방부를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종종 카 회장은 인생에서 큰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을 접견하셨다.

그런 사람들은 회개하면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이 원하는 성전 추천서 발급을 위해 선교부 회장과 접견을 해야 했다.

군인들의 몇몇 간증 모임에 같이 앉아 있으면서, 나는 회개하여 주 앞에서 깨끗하게 되고 성약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는 카 회장의 영성과 능력을 언급하며 그분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하는 많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자신들이 시련을 헤치고 나가도록 많은 도움을 준 그분의 능력에 대해 입을 모아 칭송했다. 이런 많은 사람의 간증을 들으면서 나는 카 회장이 한국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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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부 차를 탄 카 회장 (1963)

“어느 일요일, 카 회장과 함께 남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군 기지로 가서 군인들과 모임을 했는데, 카 회장은 이날 몇 건의 접견이 예정되어 있었다. 모임과 접견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려 하는데 자동차 크랭크에서 쿵 소리가 났다. 자동차는 우리가 운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카 회장은 차를 도로 한쪽으로 움직이고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 안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테니까요.”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우리의 자동차를 끌고 갈 사람을 부디 보내 주시라는 기도를 아주 간결하게 드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이 탄 덤프트럭이 나타났다. 카 회장은 그들을 멈춰 세웠다. 덤프 트럭이 멈추자, 카 회장이 일본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카 회장은 서울까지 견인을 부탁했고, 그렇게 해 주면 사례를 하겠다고도 말했다. 그들은 상당히 긴 사슬을 우리 차에 연결했다. 나는 운전사와 함께 트럭에 타고 선교 본부까지 길을 안내하면서 서울까지 갔다.

카 회장이 운전대를 잡은 선교부 차에는 트럭 일행 중 한 사람이 함께 탄 채 사슬에 연결된 트럭 뒤를 따라왔다. 서너 시간 뒤에 우리는 선교 본부에 도착했다. 카 회장과 나는 선교 본부로 올라갔다.

카 회장은 나에게 가서 샤워하고 몸을 녹이라고 말씀하신 뒤 당신은 사무실로 가서 두 사람에게 줄 돈을 가지고 오셨다.

이튿날, 평소대로 카 회장과 자매가 갓난아기 아론을 데리고 모든 장로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오셨다.

카 자매는 선교 본부와 청운동에서 봉사하는 모든 장로가 그야말로 가족처럼 다 함께 식사하면 좋겠다고 하셨고, 계속해서 그렇게 해오고 계셨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카 회장이 말씀하셨다. ‘어제저녁에 한국에 온 이래로 가장 좋은 즉석 토론을 했어요.’ 그런 다음, 카 회장은 전날 밤 고장이 난 그 선교부 차량에서 3시간 동안 동승자와 나눴던 대화를 간추려 전해 주셨다.”(“Gail Edward Carr”, Ross H. Cole, 6~7쪽)

 

(4) 카 회장의 3개 국어를 활용한 부동산 거래

한국 선교부가 조직될 당시 기간을 연장해서 선교 사업을 했던 밥 애덤스 장로는 이렇게 회고했다.

“데이비드 오 맥케이 회장은 카 회장을 도와 한국 선교부를 정착시키도록 내 선교 사업 기간을 연장하셨다. 카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보좌로서 나는 그분을 도와 부동산을 매입하고, 새로운 지역을 조직하고, 여러 지부를 재조직하고, 선교본부에서 일할 사람을 인선하고, 번역출판부를 개설하고, 선교부 절차와 선교부 기록을 작성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리가 부동산을 사들이는 과정은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카 회장과 한국인 변호사,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함께 한국인 부동산 주인을 만나곤 했다.

거래 1단계에서는 카 회장이 변호사와 부동산 주인과 함께 일본어로 거래를 면밀하게 진행했다.

2단계에서는 한국인 변호사와 내가 부동산 주인과 함께 한국어로 거래를 협상했다.

3단계에서는 모든 이가 거래에 합의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카 회장과 내가 영어로 거래에 관한 정보를 검토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모든 부동산 매입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안전 대책에도 불구하고 종종 실수는 일어났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우리는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런 노력의 과정 중에 흥미로운 몇몇 이야기가 있다.”(Bob Adams 회고, 2쪽)

 

7. 수호천사가 장로님 바로 뒤에 서 있습니다

이제부터 전할 이야기는 필자가 전혀 알지 못했던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도 성스럽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하늘의 책에만 기록되지 아니하고 활자를 통해 우리 신앙의 공동체에 널리 전해지게 된 것이 너무도 다행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실, 주님의 이 척박한 땅에 이런 이야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했지만 필자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필자는 로스 에이치 콜 전 대전 선교부 회장에게 좀 더 자세한 서술을 부탁했고, 그는 이에 흔쾌히 응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온전한 하루를 처음으로 맞이한 1962년 11월 16일, 고든 비 힝클리 장로가 부인 마조리 자매와 함께 금식 간증 모임에 참석했다. 모임에는 카 회장 부부와 22명의 선교사가 참석했다.

우리 네 명의 신임 선교사는 미국에서 한국에 도착한 지 채 20시간도 안 된 상태였다. 우리는 금식 모임에 참석했고, 성찬 전달 후에 장로들이 돌아가며 간증했다.

그런 다음, 카 회장은 고든 비 힝클리 장로를 소개하시면서 그분이 여러 차례 한국에 오신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 힝클리 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씀을 시작하셨다.

말씀을 시작한 힝클리 장로는 한국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들의 커다란 희생을 언급하시며 눈물을 쏟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도저히 말씀을 이어나가지 못하셨다.”(“Gail Edward Carr”,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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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부 개설 후 처음 방문한 힝클리 장로와 당시 한국 선교부 선교사들 (1962. 11. 15)

“힝클리 장로께서 일어서서 말씀하실 때, 그 방에 아주 엄청난 영이 임했다. 영이 너무 강한 나머지 힝클리 장로도 눈물을 흘리셨다. 힝클리 장로는 감정을 추스르고 싶어서인지 선교사들에게 찬송가 한 곡을 불러 달라고 부탁하셨다.

찬송 후에 힝클리 장로가 다시 일어나 말씀을 전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형제 여러분, 이 방에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선교사 중 하나를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로님, 수호천사가 장로님 바로 뒤에 서 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힝클리 장로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고, 잠시 모임을 쉬었다 하자고 말씀하셨다.”(개인 회신, 2021년 7월 13일)

“나는 쉬는 시간에 인사하러 카 자매에게 갔는데, 자매님은 나를 [마조리] 자매에게 소개해 주셨다. [마조리] 자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편이 공개 석상에서 지금처럼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얼마간 대화를 나눈 후에 나도 이렇게 말했다. ‘저도 카 회장님한테 세미나리를 3년간 배우면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상당히 많이 눈물을 흘리시네요.’”(“Gail Edward Carr”, 8쪽)

“주님의 영이 강하게 임했으며, 우리는 흐느끼며 간증했고, 선교사들이 말할수록 우리는 주님의 영을 더 많이 느꼈다.”(콜 형제의 개인 서신, 2021년 7월 31일)

 

8. 그 모임에 대한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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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지부 (동대문 와드) 착공 사진

로스 에이치 콜 전 대전 선교부 회장은 이렇게 단언했다.

“그날 모임은 내가 참석했던 것 중 가장 심오한 모임이었다.”(“Gail Edward Carr, 8쪽)

“힝클리 장로께서는 전에도 한국에 오신 적이 있었다. 그분은 일본으로 부름을 받고 생활하다 한국으로 이동 요청을 받고 선교 사업을 계속해 나갔던, 한국에서 봉사한 초기 선교사들의 피할 수 없는 ‘희생’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분은 선교사들의 희생을 직접 보았고, 11월의 그 날 한국에서 봉사 중이던 선교사들의 태도와 소망, 노력에 대해 잘 아셨다.

그래서 그들의 충실함이 마음에 와닿고 천사들이 그 방을 채웠을 때, 힝클리 장로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으셨으며, 그 방에 있던 고참 선교사들도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 네 명의 신임 선교사는 모임 바로 전날에 도착한 상태였다. 우리 새로운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봉사했던 선교사들의 희생과 충실함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힝클리 장로께서 방 안에 천사들이 있다고, 또 한 장로의 수호천사가 그 장로 바로 뒤에 서 있다고 언급하셨을 때, 우리는 모두 강력한 영향력을 느꼈다.”(개인 이메일 서신, 2021. 7. 13)

콜 형제의 회고는 성도들이 서부로 이주하던 교회 역사 초기, 지친 마틴 손수레 부대의 수레를 밀어주었던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이날의 모임에 대해 콜 형제만큼 자세한 서술은 아니지만, 대릴 더블유 해리스 전 서울 선교부 회장 역시 이렇게 회고했다.

“11월 15일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고든 비 힝클리 장로께서 그날 도착하셔서 여러 날에 걸친 방문을 시작하셨다. 그분은 회원들, 선교사, 군인 회원들과 모임을 하셨다. 그분이 간증을 전하면서 얼마나 우셨는지를 나는 기억한다.

그분은 교회에서 많은 선교부를 다녀봤는데, 그중에서 한국이 ‘가장 이상한 선교부’이기는 하지만 그 어느 곳의 선교사들보다도 이곳의 선교사들이 더 행복해 보인다고 하셨다.

그 ‘이상함’은 한국의 생활 여건이 미비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선교부도 이제 갓 생긴 곳이기 때문이었다.”(Korean Mission Journals, 68~69쪽)

카 형제가 세상을 떠난 후, 그웬 카 자매도 힝클리 장로와 함께했던 간증 모임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1962년 11월, 우리는 고든 비 힝클리 장로 부부의 네 번에 걸친 한국 방문 중 첫 번째를 함께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 방문들은 [남편] 게일과 내가 겪은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리고 영적인 경험이었다. …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그 방문들의 하이라이트는 선교사들과 함께하는 간증 모임이었다. 각 선교사가 일어서서 복음의 참됨과 이 사업, 교회의 회원들, 이 나라와 이 나라의 사람들, 주님을 위한 그 모든 것에 대한 사랑에 대해 간증할 때 우리가 느꼈던 감미로운 영이나 커다란 사랑의 분출은 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Korean Mission Journals, 88쪽)

9.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이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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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 자매와 아들 아론의 돌 기념 사진 (1964.2)

세 번째 인연이 시작될 무렵, 게일 이 카 형제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한 후, 전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이 분명해졌다. 내가 만일 1952년에 군에서 제대한 후 즉시 선교 사업을 나올 수 있었다면, 그때 일본에서 봉사할 특권을 누렸다 하더라도 한국에는 아직 복음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았던 때이기에 나는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즉, 나는 이 새로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일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임무 지명을 받고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봉사하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면, 한국 지방부의 관리 장로로서 내가 받은 임무 지명을 성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일본어를 습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에서 교회 법인을 등록하고 우리가 앞으로 점차 쌓아 나갈 장소인 부동산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교회 대표자 역할을 해야 할 책임을 내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중 어떤 일도 일본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국어를 배우고, 특히 법률 용어를 이해하고 한국의 복잡한 법적 절차를 파악할 만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없었지만, 교육을 받은 모든 한국인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았고, 따라서 나는 주님께서 나를 불러 시키신 일을 성취할 수 있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Biographical Sketch”, 4쪽)

그웬 카 자매는 2002년 1월 8일에 세상을 떠난 게일 이 카 전 한국 선교부 회장을 대신해서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난 지 거의 40년이 지났건만, 마치 몇 년밖에 안 된 것 같을 때가 종종 있다.

그 땅과 그곳 사람, 선교 본부와 우리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던 훌륭한 직원들, 세 번의 특별한 성탄절, 우리 아들 아론이 돌을 맞았을 때 상호부조회 자매님들이 만들어 주신 남아용 한복 선물 세트, 우리를 사랑해 주고 도와주고 우리 생활에 좋은 영향을 준 충실한 한국 성도들, 이 모든 것에 대한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 한국 성도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별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우리 다시 만날 때 하나님이 함께하소서.’”(Korean Mission Journal, 89쪽)

 

9. 마치는 글

앞서 필자는 피천득 선생과 아사코의 인연은 시간이 지나면서 멀어졌다고 적었다. 그러나 게일 이 카 형제는 일본에 주둔하며 임무를 띠고 간혹 한국 땅을 밟았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선교사들과 접촉하며 복음에 대한 지식과 일본어를 배웠다.

제대 후에 그는 우여곡절 끝에 선교 사업을 나와 북극동 선교부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마침 그가 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 도쿄 지방부 회장이었던 폴 시 앤드러스 형제가 선교부 회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또한 카 형제 본인은 한국에서 봉사하기 위해 금식하며 간절히 간구한 끝에 영의 음성을 듣고 세 번째 장로 그룹으로 한국에 와서 몇 달 후 관리 장로가 되었고, 김호직 박사와 함께 재단법인 등록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에, 새로 개설된 한국 선교부의 초대 회장으로 부름받은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몰몬경 번역 과정을 지휘하고, 청운동의 선교본부 부지를 비롯한 여러 부동산을 구입하며, 한국 최초의 표준 집회소를 착공하고, 선교사는 물론이고 한국의 모든 회원의 영적인 지도자 역할을 해냈으며, 당시 한국에서 복무 중이던 군인 형제들을 보살피고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 교회 조직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카 형제는 북극동 선교부 시절 간염으로 시달렸던 경험이 있으면서도 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던 주님의 심부름꾼이었다.

필자의 생각에 이런 게일 이 카 초대 한국 선교부 회장에게 딱 맞는 표현은 이것일 거라 본다.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주께서 정하신 때에 나아오도록 예비되었더라.”(교리와 성약 138:56)

그는 당시 주님의 포도원에서 가장 척박한 곳 중의 하나였던 이 땅에서 주님의 명에 따라 수고했던 일꾼이었다.

콜 형제는 이렇게 적었다.

“카 형제는 선교 사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선교사들을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자주 들렀다. 그 후에도 그는 자신의 선교사로 있다가 선교부 회장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러 공항에 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Gail Eeward Carr, 9쪽)

세 번째 인연이 끝난 다음에도 그는 이런 향기를 지녔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는 생전에 한국과 관련된 경험을 토대로 휘장 너머에서도 모종의 임무를 띠고 한국인을 위해 이스라엘을 모으고 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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