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으로 – 역사와 추억의 발자취   

제 10화: 게일 이 카, 주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주께서 정하신 사람, 제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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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 2021년 9월

  • 글: 김대연 (한국 교회 역사 고문)
  • 삽화: 박수경 (한국 교회역사위원회, 일러스트레이터)

게일 에드워드 카 형제는 처음에는 한국전쟁 당시 군인으로, 그다음에는 북극동 선교부 선교사로 일본에서 봉사하던 중에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한국 지방부 관리 장로로서 교회 재단법인 설립에 기여한 뒤, 마침내 새로 조직된 한국 선교부의 회장으로서 가족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와서 이곳에서 아들을 낳고 척박했던 주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며 복음 전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와 한국의 인연을 2부에 걸쳐 살펴보기로 한다. 

 

1. 고귀한 이름들

한국에서 우리 교회의 태동을 따라가다 보면 자주 접하게 되는 이름들이 있는데, 몇몇을 거명해 보자면 조셉 필딩 스미스, 해롤드 비 리, 김호직과 스펜서 제이 팔머가 있다. 사실, 나는 게일 에드워드 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그를 그저 초대 한국 선교부 회장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1962년에 한국 선교부가 독립되어 조직되면서 자리잡은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7번지에 관한 역사 기사 작성을 준비하던 도중, 나는 그 이름을 자주 접하게 되었고 그와 관련된 무언가에 이끌리게 되었다. 그러다 교회 본부 역사부와 정기 회의를 하면서 교회 역사 도서관의 소장 문서를 하나 우연히 받았는데, 그것은 카 선교부 회장이 부름을 받고 얼마 후에 작성해서 본부에 보낸 자전 에세이로, 그 내용에 필자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게일 이 카 초대 한국 선교부 회장에 대해 증언해 줄 한 사람을 떠올렸는데, 바로 필자가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던 시절 선교부 회장이었던 로스 에이치 콜 전 대전 선교부 회장이었다.

그는 카 형제가 선교 사업에서 귀환 후, 캘리포니아에서 세미나리 교사로 일하던 당시 그의 학생이었으며, 카 형제가 선교부 회장일 때는 선교사로서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그의 보좌이자 선교본부 장로로 봉사했다.

콜 형제에게 취지를 설명하자 그는 흔쾌히 자신의 일지를 근거로 여러 이야기를 적어 정성스럽게 보내 주었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역사 도서관에서 받은 문서와 로스 에이치 콜 전 대전 선교부 회장이 보내 준 문서를 읽으면서, 필자는 피천득 선생께서 오래 전에 쓴 “인연”이라는 수필을 떠올렸다.

2. 점차 멀어지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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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피천득(1910~2007)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였으며, 시인이자 수필가였다. 연배로 보면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나 8개월 먼저 돌아가셨으니 동년배라 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고집으로 그분을 교수보다는 선생으로 부르려 한다.

피천득 선생은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17세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도쿄에 도착해서 미우라 선생 댁에 머물렀다. 그 집에는 아사코라는 딸이 있었는데, 아사코는 피 선생이 도착한 다음 날, 스위트피라는 꽃을 따다 꽃병에 넣어 피천득 선생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피천득 선생이 도쿄를 떠나던 날, 아사코는 피 선생의 목을 안고 뺨에 입을 맞추고는 자기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십 년 하고도 삼사 년이 더 지난 후, 피천득 선생은 도쿄를 다시 방문했다. 그 참에 그는 그 집에 들렀는데, 아사코는 이제 대학교 영문과 3학년 학생이었다. 아사코는 그 집 마당에 피어난 목련같이 청순하고 세련된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피 선생은 아사코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옛날에 학교에서 함께 산책을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아사코는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나누다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 후로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고, 대한민국은 독립을 한 뒤 한국 전쟁을 겪었다. 피천득 선생은 1954년에 미국으로 가는 여정 중에 도쿄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다시 방문했다. 이때 피천득 선생은 아사코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인 2세 미국인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아사코 어머니의 안내로 아사코를 방문하게 되었다.

피천득 선생은 아직 젊은 나이에 시들어 가는 백합꽃 같은 아사코를 만나고 난 후 안타까운 마음에 서로 떨어져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피천득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선생은 아사코와의 세월에 대한 상념을 글로 옮기며, 그 제목을 “인연”이라 하였다.

게일 이 카 회장에 관한 2개의 글을 읽으며, 내가 왜 피천득 선생의 글을 떠올렸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카 회장과 한국의 인연은 피천득 선생과 아사코의 인연과 비슷하게 만남은 세 번이었으되, 시간이 갈수록 그 인연이 깊어 갔다는 점에서, 또한 그 인연은 현세를 넘어 영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3. 게일 이 카의 첫 인연 - 잠수함을 타고 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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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봉사할 당시의 카 장로 (1956년 4월)

게일 이 카 형제는 1930년에 유타주 유레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6남 1녀 중 다섯째이고,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1937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족은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했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그는 새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 카 형제는 이렇게 적었다.

“어릴 적에 나는 동양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생이었지만 동양 나라에 관한 책과 기사를 읽고 그들의 관습과 전통을 공부하면서 깊이 파고들었다.

18세에 군에 입대해서 한국 서울에 주둔하던 미 보병 7사단에 입대했다. 군 복무 중에 한국에서 복무할 기회는 없었고, 일본에서 3년을 복무했다. 일본에 있을 때, 나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도착한 초기 장로들이 요코하마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도록 돕는 특권을 누렸다.

나는 이 훌륭한 형제들과 교류하며 복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으며, 또한 일본어도 어느 정도 배우게 되었다.”(“Biographical Sketch of Gail Edward Carr”, 교회 역사 도서관, 2쪽)

로스 에이치 콜 형제는 이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임무는 잠수함을 타고 남한의 해안으로 가서 얼마 전에 전투가 있었던 지역에 한밤중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전쟁터로 가서 북한군 및 중공군의 침략에 대적하는 동맹군 지휘관들에게 흥미가 있을 만한 무기나 물건을 찾아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게일은 무술 훈련을 잘 받았으며 근거리에서 어떤 싸움이 일어나도 자신을 잘 방어했다. … 게일 일행은 전쟁터를 한밤중에 수색한 후 잠수함으로 돌아와서 동이 트기 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일본으로 가져온 무기와 물건들은 분석이 끝난 후 그 정보가 유엔군 지휘관들에게 보고되었다.”(“Gail Edward Carr:  First President of the Korean Mission 1962-1965, Ross H. Cole, 1쪽)

카 장로가 태어난 유레카는 유타주의 광산 도시로, 한때 제법 잘 나가던 곳이었다. 유타주에는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 사람들이 광산 또는 철도 노동자로 다수 유입되어 있었고, 그가 유년기를 보낸 캘리포니아주도 미국에서 태평양의 관문으로 여겨지는 곳이었기에 아시아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어쩌면 게일 이 카 형제는 어린 나이에 동네에서 그런 아시아인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았고, 아시아에 오고 싶어서 아시아에 주둔한 군대에 자원했다. 일본에 주둔한 군대에 복무하면서 그는 때때로 임무를 받고 한국 땅도 밟았다. 그가 이때 한국과 맺은 인연은 미약했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4. 두 번째 인연 - '너는 가게 되리라'

카 형제는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군 복무를 마친 뒤 조국으로 돌아왔다. 선교사 봉사에 대해 감독과 접견을 하면서, 그는 선교 사업과 학업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을 포함하여 전시에 군 복무를 한 제대 군인들에게 주택자금 및 일반 융자 혜택과 학자금 대출에 관한 우대를 규정한 제대 군인 지원법이 있었는데, 대학 교육이나 훈련 기관에 대한 교육비 지원은 제대 후 2년 이내에 교육을 시작해야 했다.

따라서 3년의 선교 사업을 마치고 오면, 유예기간 2년이 만료된다. 카 형제는 감독의 권유에 따라 이에 대해 캘리포니아 재향군인회에 유권 해석을 요청했는데, 불가 회신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일단 컴프턴 주니어 컬리지를 졸업한 후, 브리검 영 대학교에 진학했다. 이때 그는 같은 유권 해석을 유타주 재향군인회에 요청했으며, 이번에는 선교 사업 기간을 교육비 지원 유예 적합 사유로 인정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법안으로 보장된 교육비 지원도 받고, 선교 사업을 하는 기회도 다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길이 열렸고, 1955년 1월에 나는 교회를 위해 선교사로 일본에 다시 돌아왔다.”

1954년, 1955년과 1956년은 한국의 교회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1954년 9월에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해롤드 비 리 장로가 방한했고, 이듬해인 1955년 8월 2일에는 조셉 필딩 스미스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 한국의 서울 남산 인근에서 한국을 복음 전도지로 헌납했다.

1956년 4월 20일에는 일본 도쿄에 선교 본부를 둔 북극동 선교부에서 돈 지 파웰 장로와 리차드 엘 데튼 장로가 한국으로 파견되었는데, 이 시기에 게일 이 카 장로도 북극동 선교부에서 봉사 중이었다. 이 시기에 대해 카 형제는 이렇게 적었다.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 몇 달 후,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께서 에이치 그랜트 히튼 회장 부부와 함께 일본에 도착하셨다. 히튼 회장은 중국에서 선교 사업을 재개하도록 부름을 받으셨다고 했다.

스미스 회장은 모든 선교사가 참석하는 대회를 소집하셨는데, 이후로 일본 선교부는 북극동 선교부로 이름이 바뀌며, 나아가 한국과 오키나와는 복음 전도를 위해 헌납될 것이고, 나머지 지역은 히튼 회장이 이끄는 남극동 선교부에서 관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

여러 달 후, 폴 시 앤드러스 회장이 힐튼 제이 로버트슨 회장 후임으로 북극동 선교부 회장이 되었다. 그분은 내가 여러 해 전, 일본에서 군 복무할 때 도쿄 지방부 회장으로 계셨기에 안면이 있었다.

선교부 도착 후에 앤드러스 회장은 한국의 문이 곧 열릴 것이며, 우리 중에서 몇몇 사람은 한국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가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발표 이후로 나는 한국으로 가서 그 일을 돕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고, 그 일에 대해 열심히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는 한국에 가고 싶은 열망이 너무 커진 나머지 일본에서 선교사로서 해야 할 일에 조금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이 일에 대해 금식하고 기도해 보기로 했다. 내가 한국으로 가야 하는지, 그게 알고 싶었는데, 만약에 그것이 의롭지 못한 소망이라면, 또 그 소망이 현재 임무에서 내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 소망을 어서 내게서 거두어 가 주시기를 간구하기로 했다.

금식 삼 일째 되던 날 밤, 동반자인 리드 제이 매클레이 장로와 나는 동반자 기도를 마치고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개인 기도로 하루를 끝냈다. 나는 이렇게 은밀히 기도하는 시간을 빌려 내가 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든지, 아니면 불의한 소망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을 구했다.

동반자가 개인 기도를 마치고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에 조용히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내 소망을 주님께 계속 들이댔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 아니 얼마나 지났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 능력을 다해 아주 겸손하게 나 자신을 낮추고 다시 한번 기도에 대한 응답을 간구했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음성이 들렸다. 나의 아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는 가게 되리라. 나는 즉시 확고한 평안을 느꼈다. 전에는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연신 대답했다.

그때 얕은 잠에 빠져 있던 동반자가 벌떡 일어나 ‘뭐라고 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아무 일도 아닙니다, 장로님. 내일 이야기합시다.’라고 대답했다. …

일본에서 1년 반 동안 봉사한 뒤, 나는 1956년 8월에 래리 디 옴 장로, 칼 플래처 장로, 클로드 뉴먼 장로와 함께 한국의 서울로 날아갔다. 우리는 한국에 입국한 세 번째 장로 그룹이었다. 첫 그룹은 돈 지 포웰 장로, 리차드 엘 데튼 장로였고, 두 번째 그룹은 뉴월 이 킴볼 장로와 딘 엠 앤더슨 장로였다.”(“Biographical Sketch of Gail E. Carr”,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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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무신을 신고 회원들과 함께한 카 장로

“카 장로는 처음에는 뉴월 킴볼 장로의 동반자로 지명되었다. 나중에 카 장로는 유락동에서, 그다음에는 삼청동에서 봉사했다. 한국에 도착하고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카 장로는 한국 지방부에서 봉사하는 모든 선교사의 관리 장로로서 부름을 받아 선교사 해임 때까지 봉사했다.”(“Gail Edward Carr”, Ross H. Cole, 2쪽)

이렇게 선택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카 형제와 한국의 두 번째 인연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더 많은 사람에게로 확장되었다.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북극동 선교부 소속인 그가 멀리 있는 한국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들의 대표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들의 대표로서 그가 기여한 가장 큰 일은 아무래도 김호직 박사와 함께 우리 교회를 재단법인으로 등록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5. 세 번째 인연 – 포도원에서 척박한 땅을 일구는 선교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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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부 회장 부름을 알리는 Church News에 게제된 사진(1962년 5월 26일자)

“게일 카와 그웬 히버트는 1960년 8월 26일에 로스앤젤리스 성전에서 결혼해서 캘리포니아 린우드에 살았다. 카 형제는 1960~1961학년도에 세미나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학업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학교로 복귀하고자 했다.

1962년, [32세의] 카 형제와 그의 사랑하는 아내는 곧 새로 만들어질 한국 선교부를 감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두 사람은 1962년 6월 24일, 일요일에 린우드 제2와드에서 선교사 환송 모임에 참석했다.

모임은 루이스 하인 감독이 감리했으며, 개회 기도는 리처드 엘 데튼이 했는데, 그는 북극동 선교부의 한국 선교부에서 봉사하도록 최초로 부름을 받은 선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

카 형제의 세미나리 학생 중 한 사람이 바이올린 독주를 했다. 카 형제와 자매의 부모도 참석해서 말씀을 전했다. 아주 훌륭한 모임이었으며, 모든 사람이 주님의 영을 느꼈다.

카 회장 부부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일주일 동안 선교부 회장 부부 훈련을 마쳤다. 그리고 1962년 7월 6일 금요일에 [북극동 선교부의] 앤드러스 회장 부부와 카 회장 부부는 함께 한국 서울에 도착했다. 김포공항에서 일단의 회원들과 선교사들은 교회 찬송가를 부르며 그들을 환영했다. 앤드러스 회장은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부를 조직했으며, 게일 이 카 회장이 선교부 회장으로 지지를 받았다.”(“Gail Edward Carr”, Ross H. Cole, 4~5쪽)

“당시 한국의 교회 회원 수는 총 1,603명으로, 서울 중앙 지부 386명, 서울 동부 지부 229명, 서울 동대문 지부 223명, 서울 서부 지부 269명, 부산 지부 292명, 미군 지부 204명이었다.”(“President Gail E. Carr – Memoriam”, Darryl W. Harris, Korean Mission Journals, 89쪽)

카 회장은 선교부 회장으로 오기 전에도 한국과 이런저런 인연이 있었지만, 이곳은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흐른 당시에도 여전히 주님의 포도원에서 척박한 곳 중의 하나였다. 아니, 가장 척박했다 할 것이었다. 이곳에는 선교부 회장인 그가 몸으로 부딪치며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몇 가지 사건을 통해 당시를 되돌아보기로 하자.

선교부 분리 당시 한국의 선교 상황에 대해 1962년 5월 26일 자 처치 뉴스는 이렇게 전한다.

“북극동 선교부의 한국 지방부는 [1961년]에 이 지역 선교사 1명당 평균 18명을 개종시키는 괄목할 만한 기록을 세웠다. 당시의 선교사 수는 22명이었다.

[카 형제는] 분리 결정을 할 때 현재의 선교 본부와의 거리 및 여행, 언어와 번역 문제 등이 고려되었다고 말했다.

몰몬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며, 여러 종류의 전도 책자는 이미 번역이 되어 있다. 조만간 한국어로 인쇄될 교재들은 주님의 일을 한층 촉진해 줄 것이다.

카 회장은 서울에 선교 본부를 마련하여 선교부 운영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새로운 개종자를 감독하고 조직하는 일이 제일 먼저 매달려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Church News, 1962. 5. 26, 5)

처치 뉴스 기사에 나와 있듯이, 게일 이 카 초대 한국 선교부 회장의 주요 업적은 몰몬경 완역을 추진하고 한국 선교부 본부를 마련한 것이었다. 몰몬경 번역에 대해서는 본 연재 기사의 8화와 9화를 비롯해 리아호나 지역 소식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또한 서울 종로구 7번지로 대변되는 선교 본부 취득에 대한 기사는 별도로 계획 중이며, 여기서는 로스 에이치 콜 전 대전 선교부 회장(1989~1992)과 대릴 더블유 해리스 서울 선교부 회장(1997~2000)의 회고를 토대로 카 한국 선교부 회장과 관련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이렇게 카 형제와 한국의 세 번째 인연은 선교부 회장 부름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번의 인연은 영원한 관점에서 볼 때, 개인과 개인, 개인과 여러 사람, 그것도 현세적 경계를 넘어 휘장 저편까지 효력이 미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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