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일: 2021년 8월
- 글: 김대연 (한국 교회 역사 고문)
- 삽화: 박희령 (한국 교회역사위원회, 일러스트레이터)
우리 교회의 종석인 몰몬경 번역을 알리는 국내 유력 일간지 기사, 몰몬경 번역의 필요성, 우리보다 2년 먼저 출간된 중국어 몰몬경의 당시 상황, 왜색 언어 말소라는 우리의 당시 상황 등을 2부로 나누어 살펴본다.
5. 몰몬경 번역을 위한 주변 상황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영어 및 교리에 대한 이해력 이외에도 번역자의 경제적 여건과 번역에 필요한 시간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에 관해서 경전 번역의 원조 격인 조셉 스미스도 마찬가지였다.
1828년 초, 올리버 카우드리가 서기가 되었을 때, 조셉과 올리버는 조셉 나이트 일세를 찾아가 식량을 부탁했고, 조셉 나이트는 약간의 돈과 물고기, 곡식, 감자 등의 식량 외에도 기록을 위한 종이까지 마련해주었고, 두 사람은 이런 호의에 무척 기뻐했고, 식량은 번역이 끝날 때까지 충분히 견딜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한 교회 역사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조셉 나이트 일세는 세상이 몰몬경을 일찍 받도록 도와주었다. 만일 선지자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면 번역은 여러 해가 걸렸을 것이다.” (“나이트 가족: 제1부, 윌리엄 지 하틀리, 『성도의 벗』, 1989년 10월호, 26~27쪽)
이런 재정적 후원을 바탕으로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는 아론 신권과 멜기세덱 신권을 받고, 침례식과 설교, 몰몬경 판권 업무 등 꼭 필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번역 업무에 전념했을 것이다.
1950년부터 3년 이상, 당시에 가장 현대적인 무기를 사용하며 가장 격렬했던 전쟁을 겪어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된 한국에서 생계를 제쳐 놓고 번역 일에 시간을 충분히 낼 만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몰몬경 번역자에 관한 3가지 가능성을 간략하게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첫째, 미국인 선교사들은 너무 적은 인원이었고, 얼마간의 일본어는 가능하였지만, 한국어는 새로 배워야 했다. 그리고 몰려드는 구도자를 가르치는데 많은 시간을 써야 했다.
둘째, 한국인 회원 중에는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경제적 또는 사회적인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호직 박사는 고위 공직자로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그 뒤를 이은 장세천 형제는 도중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 뒤에 군 복무를 마친 홍병식 형제가 번역자로 성별되면서 번역을 마치고서야 『니파이삼서』가 실제적인 결과로 1962년 3월에 출간되었다.
또한, 복음 전도에 이용되었던 대체 언어였던 영어와 일본어 중에서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었는데, 그 일면을 조선일보는 1956년 7월 10일 지면에서 이렇게 전한다.
“왜색말소 요청 – 내무부에서 문교부에
9일 내무부 장관은 문교부 장관에게 공문으로서 관하 각 기관에 왜색말살을 기하도록 지시하여 달라고 요망하였다. 동공문에 의하면 각 금융기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예금통장에 왜어 기입의 말살과 고적명승 등에 기입 조각된 왜색 년월일 각종 기계공장에 기재되어 있는 상호 각종 차량 철도교량 등에 기입되어 있는 왜색 년월일 및 상표 기타 전화 「다이얄」 등에 기입되어 있는 왜색문구 등은 이를 말소 소멸하여 사용토록 하라는 등의 요지라고 한다.”
1967년 몰몬경 출간에 앞서 번역을 시도한 여러 번역자들은 영문 경전과 더불어 일본어 몰몬경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1945년 독립과 더불어 사회 전번에 팽배했던 일본어 배격 분위기 속에서 재단법인 등록의 주무 부서가 문교부였으며, 김호직 박사가 문교부 차관과 서울시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음을 생각해보면, 이런 경향은 몰몬경 번역 출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례로 정대판 형제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일부러 남긴 역사 메모에 이렇게 적었다.
“몰몬경 – [김호직]박사님께서 ‘Mormon’을 영어 발음대로 하자면 ‘모오몬’이 되고, 외국어 한글표기법을 따르면 ‘모르몬’이 된다고 하셨다. 장[세천] 형제가 몰몬경을 주장하였고 ‘모르몬’은 일본 표기와 같아지니 배제하자고 해서 결국 ‘몰몬’으로 낙착되었다. …
값진 진주 – 장 형제가 ‘great price’는 고가, 즉 값이 비싸다는 것이니 고가의 진주로 해야 한다고 우겼고 나는 일본 번역과 같아지니 값진 진주로 해야 한다고 하여 결국 김 박사님이 내 의견을 채택해 주셨다.”(“한국 교회 초기 역사: 경전 번역 문제, 1쪽, 2011. 6. 15)
정대판 형제는 이런 대화가 1956년 11월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은 대체어가 있으면 일본식 용어를 배제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며, 이런 배제 노력은 몰몬경 번역본을 검토할 때도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서, 우리보다 2년 먼저인 1965년 출간된 중국어 몰몬경에 관해 잠시 살펴보는 것도 경전 출판에 따르는 어려움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6. 중국어 몰몬경의 출간
당시 중국어 몰몬경이 주로 필요한 곳은 홍콩과 타이완을 담당하는 남극동 선교부였다. 1955년에 교회는 일본 선교부를 둘로 나누어 일본 도쿄에 북극동 선교부를, 그리고 홍콩에 남극동 선교부를 조직하였으며, 에이치 그랜트 히톤 선교부 회장이 부름을 받아 1959년까지 봉사했다.
1960년 무렵, 십이사도 정원회는 전 세계를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사도들에게 관리 책임을 주었으며,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반대편에 있던 아시아는 십이사도 보조였던 힝클리 장로가 맡았다.
“아시아를 관리하는 임무지명을 [1960년에] 받았을 때, 힝클리 장로의 우선순위 사항 두 가지는 중국어 몰몬경 출판과 한국어 몰몬경 출판이었다. 중국어판이 인쇄되어 나오고, 한국어판이 거의 완료되면서, 그는 그 어려움 임무를 끝낸 번역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The Biography of Gordon B. Hinkckley, by Sherl L. Dew, Deseret Book, 1996, 268쪽)
현지어 몰몬경 발간과 관련하여, 남극동 선교부의 당시 사정에 관해 한 학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히톤 회장이 귀국한 후, 테일러 [선교부] 회장은 몰몬경의 번역을 독려했지만, 퀴일리 선교부 회장 때서야 비로소 힝클리 장로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프로젝트에 열의를 보여 번역 작업이 제 궤도에 올랐다. 1963년 7월에 힝클리 장로는 ‘중국어 몰몬경 번역을 감독하도록’ 당시 대만 국립대학교 학생이었던 래리 킹 브라우닝에게 부름을 주었다. 그는 프로젝트에서 함께 일할 적절한 중국어 번역자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브라우닝은 후 에이 위를 선임했고, 그는 선교부 회장단에서 보좌로 봉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의 2년을 함께 일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서로의 임무지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러 점에서 의견이 달랐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일이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힝클리 장로가 믿고 있음을 알았고, 결국은 후 형제가 좋은 번역이라고 믿는 것들도 넣었다. 브라우닝 형제는 동의하지 않았다. 후 형제는 몰몬경을 번역할 때 상류층 언어를 피하고 중류층 수준에서 직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라우닝은 책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후 형제의 의견이 채택되었고, 1965년 12월 20일, 몰몬경 1천부가 발간되었다. 몇 달 뒤, 2,500부가 더 인쇄되었다. 이 몰몬경은 중국어를 사용하는 성도들에게 아주 소중했다. 힝클리 장로는 새로 번역된 몰몬경을 받았을 때 무척 기뻤다. 그는 중국어 몰몬경을 맥케이 회장에게 전달했고, 아시아에서 교회 업무를 관리하도록 임무지명을 받았을 때 2개의 주요 목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중국어 몰몬경이 인쇄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국어 몰몬경이었으며, 당시 한국어 몰몬경은 인쇄에 들어간 상태였다.”(“From the East”, R. Lanier Britsch, Deseret book, 1998, 266쪽)
이렇듯, 중국어 몰몬경 번역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처음 하는 경험이었으며, 교회도 아시아에서는 처음 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번역자였던 후 웨이 위 형제를 1958년에 만나 복음을 처음으로 소개했던 선교사는 그의 개종 과정을 나누고는 이렇게 적었다.
“말이 난 김에 얘기하자면, 후 웨이 형제가 복음을 알게 될 당시에 중국어 몰몬경의 다른 원고를 교회의 관련 부서에 보내기 위해 준비 중이었지만, 그만 분실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Missionary Moment: The Remarkable Story of the Translation of the Chinese Book of Mormon”, https://latterdaysaintmag.com/article-1-7444/)
7. 마치는 글
한국어 몰몬경은 북극동 선교부의 폴 시 앤드러스 회장과 한국 선교부의 게일 이 카 회장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고, 번역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결정해 이뤄낸 성과였다. 즉 누가 번역하고, 누가 검토하고, 어떻게 인쇄하고, 배포해야 할 지에 관해 기도를 통해 결정한 결과였다. 그것은 중국어 몰몬경도 마찬가지였다.
게일 이 카 당시 선교부 회장의 아내는 이렇게 적었다.
“남편은 이 일에 관해 많이 생각하고 기도한 끝에 이 중요한 임무를 한인상 장로에게 맡겨야 한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장로는 교회에서 전임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한 장로는 한국어 및 영어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과 겸손, 헌신, 인내심과 일에 대한 열정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Korean Mission Journals』, 88~89쪽)
한국어 몰몬경은 현지에 파송된 선교사가 경전을 번역했다는 면에서는 교회 초기 역사의 전통을 따르는 한편, 한국의 교회 회원들이 김호직 박사부터 시작해서 완역 또는 출간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번역 작업을 한국을 잘 알았던 선교부 회장의 지시에 따라 한국인 선교사가 마침표를 찍었다는 점에서는 특이하며, 한국인의 마음의 언어로 주님의 말씀을 옮겨 놓는,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특징을 보였다 할 수 있다. 한국어 몰몬경 출간 이후, 1970년대부터는 교회 본부 번역 부서가 번역 작업을 주도했다.
당시 선교사 한인상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그 번역이 완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비록 내가 온전한 성신의 은사를 입지 못하였으되 적어도 기도의 자세로 임했고 많은 날의 금식과 그 밖에도 또 많은 것을 지불해야 했다. … 다만 내가 선교사였기 때문에 내게 몰몬경의 번역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몰몬경 소고 1부, 『성도의 벗』, 1967년 3월호, 17쪽; 몰몬경 소고 2부, 『성도의 벗』, 1967년 4월호, 28쪽)
1962~1965년에 선교사로 봉사했던 에드윈 젠슨 장로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몰몬경을 번역하고 있었으며 저는 지부 회장이었습니다. 다른 선교사 두 명과 함께 전도를 마치고 지부로 돌아와 한 인상 장로를 만났던 어느 날 저녁이 기억납니다. 그때 한 장로는 그날 해야 할 번역을 다 마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그 날 번역한 구절 하나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는데, 한 장로가 낭독할 때 영이 강하게 임했습니다.”(Korean Mission Journals, 95쪽)
당시 몰몬경은 앞선 10여 년의 희생과 노력을 토대로 영적인 엔다우먼트를 받는 선교사들의 영과 권능으로 그간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국인의 마음의 언어로 옮겨진 것이다.
그 당시, 몰몬경이 가장 필요했던 사람들, 즉 한국에서 봉사 중이던 선교사들은 한국어 몰몬경을 갖게 되었고, 다음 해에는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를 손에 쥐게 되었으며, 이제 한국에서 경전을 바탕으로 한 선교 사업을 통해 주님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본격적으로 전파할 채비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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