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으로 – 역사와 추억의 발자취     

제 7화: 최초로 한국에 온 후기 성도는 누구일까? 제 2부 

시간 속으로 – 역사와 추억의 발자취

기사 작성일: 2021년 5월

  • 글: 김대연 (한국 교회역사위원회 전문가)
  • 일러스트레이터: 박수경 (한국 교회역사위원회, 일러스트레이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를 캐는 것이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정보가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그 대답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제부터 필자가 쫓아온 길을 함께 거슬러 올라가며 지난 시간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1부에서는 1)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한 후기 성도 군인들, 2) 1945년, 대한민국의 광복과 더불어 한국에 주둔한 후기 성도 군인들, 3) 1921년, 데이비드 오 맥케이 사도의 세계 일주 여행 과정에서 한국을 방문한 일을 다루었는데, 제2부는 그 이전에 한국 땅을 밟은 후기 성도들을 다루며, 이야기 번호는 제1부의 1~3번에 이어 4번부터 시작한다.

4. 일본 선교부 3대 테일러 회장과 4대 토머스 회장의 여행 (1910, 1912년)

1) 앨마 오언 테일러 회장
필자는 앨마 오 테일러에 관한 이야기를 BYU Studies라는 계간 학술지, 2001년 1호에 Reid L. Neilson의 기고 기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앨마 오언 테일러는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히버 제이 그랜트 장로와 함께 1901년에 일본으로 갔던 3명의 선교사 중 하나였다. 그는 당시 18세였다. 나중에 그는 호레이스 에스 엔사인 회장에 이어 1905년 7월부터 19010년 1월 1일까지 3대 회장으로 봉사하다가 제일회장단의 지시로 1월 10일, 동반자 프레데릭 에이 케인 장로와 함께 일본 도쿄를 출발하여 한국과 중국을 답사하고, 3월 18일에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해서 4월 26일에는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한다. 그들은 한국에서 경부선을 이용하여 여행하며 나름대로 한국을 경험하고, 여행의 목적인 한국과 중국의 현지 정보를 수집했다. 이 두 사람은 한국에서 약 2주, 중국에서 약 4주 체류했고, 케인 장로는 “한국 보고서”를, 테일러 장로는 “중국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 보고서는 교회 역사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한국 보고서는 조만간 이 지면을 빌려 공개할 계획이다.

 

집회소
사진 1) 1902년경, 일본 선교부 선교사 1910년 1월, 테일러 장로와 케인 장로가 한국을 방문했다. 가운데 줄, 앨마 오 테일러(첫 번째), 프레데릭 에이 케인 (네 번째), 히버 제이 그랜트(다섯번째)

2) 앨버트 덩컨 토머스 회장
앞서 언급한 테일러 회장에 이어 1910년 1월부터 1913년 4월까지 제4대 선교부 회장으로 봉사한 토머스 회장도 귀환하면서 가족(사진 속의 여성과 아기)과 함께 중국, 인도, 중동,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필자는 토머스 회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2005년에 한국 헌납 50주년 역사를 기술하면서 인터넷으로 한참 검색을 하던 중 우연히 그에 관한 내용을 찾게 되었고, 50년사 초고에 그 내용을 삽입했으나 최종 출판물에서는 삭제된 일이 있다. 토머스는 일본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소책자를 일본어로 썼으며, 1932~1950년 사이에 미국 유타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깊이 관여했다. 이들의 여행에서 한국 관련 부분은 많지 않으리라고 추측되지만, 이들 부부가 평생 기록한 일지가 여행 관련 부분을 비롯해 Utah Department of Heritage and Arts에 기증되어 소장 중이며, 조사와 연구를 통해 규명이 더 필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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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911년경, 일본 선교부 선교사들 앨버트 디 토머스 회장과 에드나 에이치 토머스 자매와 아기 (앞줄 왼쪽부터 네 번째, 다섯 번째 사람)

5. 하치로 모리 (1908년 2월)

사실, 필자는 앨마 오 테일러 회장보다 한국에 먼저 온 교회 회원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필자는 그의 일기의 디지털 사본이 브리검 영 대학교 해롤드 비 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열람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인의 수기 필적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속독에 부담이 있었는데, 천만다행으로 그 자료는 검색이 가능하도록 이미 정리가 되어 있었다. 자료를 만나면 늘 그렇듯 무심코 “Korea”를 검색해 보았는데, 그 결과 수십 쪽이 검색되었고, 그가 한국을 방문했던 1910년 이전에도 몇 개의 검색 결과가 떠올랐다. 이것이 하치로 모리를 찾게 된 경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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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1908년 4월 28일, 화요일, 테일러 회장의 일지. 빨간줄 부분: from Bro. Hachiro Mori who is now in Corea

앨마 오 테일러 회장의 일기에 따르면, 하치로 모리는 1907년 11월 25일에 침례를 받았고, 테일러 장로가 몰몬경을 번역할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 하치로 모리는 침례를 받기 이전인 9월에 담배 회사로 직장을 옮겼는데, 이듬해인 1908년 2월에 회사에서 한국 근무에 대한 제안을 받고 2월 26일에 일본을 떠난다. 별다른 일이 없었으면, 모리 형제는 2월 말, 늦어도 3월 초에는 부산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후 모리 형제가 한국의 어느 곳에서 일했는지 추적할 수는 없었지만, 테일러 장로는 1908년 4월 28일에 모리 형제에게서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 편지를 받았다. 테일러 장로는 모리 형제에게 선교 본부에서 번역을 돕는 서기 역할을 제안한 적이 있으며, 한국으로 가게 되면 교회가 없는 그곳에서 그의 영적인 복지가 어떻게 될지를 우려했다. 실제로 그는 얼마 가지 않아서 신앙이 흔들렸으며, 결국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다.
1910년 1월 13일, 테일러 장로와 케인 장로는 부산에서 모리 형제와 만나 한국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두 장로는 그렇게 바다 건너에서 홀로 생활하는 새로운 개종자에게 성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6. 마치는 글

“처음으로 한국에 왔던 후기 성도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30년 이상을 추적하면서 필자가 얻게 된 정보를 차례로 소개했다. 교회 역사를 다루면서 정보가 한꺼번에 주어진 적은 없었다. 조그만 퍼즐 조각을 가지고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어디에 맞는 조각인지 시도해 봐야 할 때가 많았고, 점차 드러나는 연관성에 적지 않게 놀랐던 적도 많다. 위에 언급한 짧은 이야기들 사이에도 밝히지 못한 연결고리들이 더 있으며, 조만간 그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회복된 복음이 이 땅에 오기까지 많은 사람이 신앙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미국 동부의 농촌에서 시작된 복음이 미대륙과 태평양을 넘어 한국에 오기까지, 그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하늘의 명령을 수행해 왔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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